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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by 장삼도 2023. 10. 23.

입술을 다문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인선의 옆얼굴을 나는 보았다. 특별한 미인이 아니지만 이상하게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녀가 그랬다. 총기 있는 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성격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어떤 말도 허투루 뱉지 않는, 잠시라도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 때문일 거라고. 인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혼돈과 희미한 것, 불분명한 것들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과 몸짓에 배어 있었다. 

-44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육지 말과 다르게 활용되는 동사와 형용사의 어미들이었다. 가끔 회화 연습도 했는데, 하다- 핸- 하멘- 하잰으로 이어지는 시제 활용을 내가 틀릴 때마다 인선은 웃음 띈 얼굴로 교정해주었다. 언젠가 그녀는 말했다. 

 바람이 센 곳이라 그렇대. 어미들이 이렇게 짧은 게. 바람소리가 말끝을 끊어가버리니까. 

-73

 

마치 연인들이 짧은 이별을 미루기 위해 우회로를 택하듯 계속해서 지하철역 반대 방향으로 걸으며, 모퉁이를 돌 때마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듯 펼쳐지는 고요한 횡단보도를 건너며 나는 기다렸다. 침묵을 깨고 인선이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83  

 

 내가 퇴원해서 함께 제주 집으로 돌아간 밤에 엄마는 한번 더 그 눈송이 이야기를 했어. 이번엔 그 꿈 이야기가 아니라, 그 꿈이 기원한 생시 이야기를. 아직 회복도 안 된 나에게 또다시 도망갈 힘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밤새 곁에 누워서 내 손목을 잡고, 잠결에 놓았다가도 흠칫 놀라 다시 꽉 붙잡으면서. 

 엄마가 어렸을 때 군경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그때 국민학교 졸업반이던 엄마랑 열일곱 살 이모만 당숙네에 심부름을 가 있어서 그 일을 피했다고 엄마는 말했어. 다음날 소식을 들은 자매 둘이 마을로 돌아와, 오후 내내 국민학교 운동장을 헤매다녔대.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여덟 살 여동생 시신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포개지고 쓰러진 사람들을 확인하는데, 간밤부터 내린 눈이 얼굴마다 얇게 덮여서 얼어 있었대. 눈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니까, 이모가 차마 맨손으론 못하고 손수건으로 일일이 눈송이를 닦아내 확인을 했대. 내가 닦을 텥니까 너는 잘 봐, 라고 이모가 말했다고 했어. 죽은 얼굴들을 만지는 걸 동생한테 시키지 않으려고 그랬을 텐데, 잘 보라는 그 말이 이상하게 무서워서 엄마는 이미 소맷자락을 붙잡고, 질끈 눈을 감고서 매달리다시피 걸었대. 보라고, 네가 잘 보고 얘기해주라고 이모가 말할 때마다 눈을 뜨고 억지로 봤대.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

-84

 

젖은 아스팔트 위로 눈이 내려앉을 때마다 그것들은 잠시 망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 그래야지... 라고 습관적으로 대화를 맺는 사람의 탄식하는 말투처럼, 끝이 가까워질수록 정적을 닮아가는 음악의 종지부처럼, 누군가의 어깨에 얹으려다 말고 조심스럽게 내려뜨리는 손끝처럼 눈송이들은 검게 젖은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았다가 이내 흔적없이 사라진다. 

-89

 

눈처럼 가볍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눈에도 무게가 있다. 이 물방울만큼.

새처럼 가볍다고도 말한다. 하ㅏ지만 그것들에게도 무게가 있다. 

(중략) 새들이 조금 먹는 건 위가 정말 작아서 그런 거야. 피도 체액도 아주 조금뿐이어서, 약간만 피를 흘리거나 목이 말라도 생명이 위험해진대. 

-109

 

지난해 가을, 목작업을 하는 인선을 두고 정류장까지 산책 나왔다 돌아가는 길이면 키 큰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천이 스치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내가 느끼기에 이 섬의 바람은 마치 배음처럼 언제나 깔려 있는 무었이었다. 거세게 몰아치든 온화하게 나무를 쓸고 가든, 드물게 침묵할 때조차 그것의 존재가 느껴졌다 특히 침엽수들과 아열대 활엽수들이 섞여 자라는 구간에서는, 수종에 따라 다른 속도와 리듬으로 가지와 잎사귀들 사이를 통과하며 형용 못할 화음을 만들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동백 잎사귀들이 매 순간 각도를 바꾸며 햇빛을 되쏘았다. 삼나무 줄기를 타고 까마득한 높이까지 감겨 올라간 단풍마 덩굴이 그넷줄처럼 흔들거렸다.. 어디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는 동박새들이 신호를 주고 받듯 번갈아 울었다. 

-129

 

방금까지 따뜻한 피가 돌았던 듯 생생한 적막에 싸인 조그만 몸을 들여다보는 동안, 그 끊어진 생명이 내 가슴을 부리로 찔러 열고 들어오려 한다고 느꼈다. 심장 안쪽까지 파고들어와, 그게 고동치는 한 그곳에서 살아가려 한다. 

-150

 

 어떤 것과도 닮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섬세한 조직을 가진 건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차갑고 가벼운 것은. 녹아 자신을 잃는 순간까지 부드러운 것은.

 이상한 열정에 사로잡혀 나는 눈 한줌을 움켜쥐었다가 펼쳤다. 손바닥 위에 놓인 눈이 새털처럼 가벼웠다. 손바닥이 연한 분홍빛으로 부푸는 동안, 내 열기를 빨아들인 눈이 세상에서 가장 연한 얼음이 되었다. 

 잊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부드러움을 잊지 않겠다. 

 그러나 이내 견딜 수 없이 차가워져 나는 손을 털었다. 흠뻑 젖은 손바닥을 코트 앞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삽시간에 딱딱해진 손을 남은 손에 비볐다. 열기가 지펴지지 않았다. 몸속 온기가 모두 손을 통해 빠져나간 듯 가슴이 떨려왔다. 

-186

 

 오래 혼자 있으면 혼잣말을 하게 되잖아.

 동의를 구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인선이 말을 이었다. 

 어떤 말을 중얼거린 다음에, 그걸 부인하려고 좀더 큰 소리로 아니라고 말하는 버릇이 생겼어. 

 나는 캐묻지도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정확히 대답해야만 하는 의무를 부과받은 듯 그녀는 신중하게 다음 말을 골랐다.. 

 혼이 들어선 안되는 말, 정말로 혼들이 들어줄지 모를 소원... 그런 걸 뱉은 다음에, 종이에 쓴 걸 찢어버리듯이.

 연필을 힘껏 눌러써서 종이에 자국을 남기듯 인선의 음성이 분명해졌다. 

 그러니까 아미한테는 뒤의 말만 제대로 들렸을 거야. 내가 그렇게 우는 동물인 줄 알고 따라 했는지도 모르지. 

 

 그 소원이 뭔지 나는 묻지 않았다. 내가 아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싸우는 것. 날마다 썼다 찢는 것. 화살촉처럼 오목가슴에 박혀 있는 것.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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