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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밑줄 긋기

완벽한 아이 - 모드 쥘리앵

by 장삼도 2023. 5. 5.

 어머니는 내가 펜으로 굵은 선과 가는 선을 다 잘 긋는지 지켜보다가 조금만 잉크가 번져도 마구 화를 냈다. 아예 내가 써놓은 페이지를 찢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쓰게 하기도 했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려서 어떻게 해야 눈물을 참을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잉크는 금방 번지고, 그러면 어머니는 더욱 짜증을 냈다. 쓰기 수업이 끝나면 나는 잉크 범벅이 되어 시커매진 손으로 방을 나서곤 했다.

 어머니 눈에 나는 음흉한 아이, 바닥 없는 우물처럼 사악한 생각이 가득한 아이다. 글을 쓰면서 일부러 얼룩을 만들고, 식탁 유리도 일부러 금가게 한다. 발을 헛디디는 것도, 정원에서 풀을 뽑다가 살갗이 벗져기는 것도 일부러 하는 짓이다. 나는 일부러 넘어지고, 일부러 긁힌다. 밥 먹듯이 속이는 '협잡꾼'에, 뭐든 늘 거짓으로 꾸며대는 '가식덩어리'다. 나는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다 하는 아이다.

-064p.

 

 그런 전투를 치르기에 최적인 자리는 물론 교황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교황이 될 수 없다. 교황이 되려면 주교 하나가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고환을 만져보고 라틴어로 "있다! 분명히 있다!"라고 소리치는 검사를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181p.

 

목욕을 하는 날에는 왼쪽 옆구리에서 겨드랑이로 이어지는 다른 흉터도 자세히 살펴본다. 뒤틀리고 부어오른 칼자국 위로 비스듬한 감침질 자국이 있다. 상처를 손가락으로 훑어보면 단단해진 살갗이 요철처럼 들쑥날쑥하다. 나는 <웃는 남자>의 주인공 그윈플렌처럼 몸이 훼손된 기분이다. 그윈플렌처럼 "가슴속에 고통과 분노가 뒤엉킨 시궁창이, 얼굴에는 만족한 표정의 가면이" 있는 것 같다.

-204p.

 

음울한 잿빛의 날들이 이어진다. 내 안에 기쁨을 위한 자리는 단 한 곳도 남지 않았다. 무엇을 하든 내일은 오늘과 같거나 더 나쁠 것이다. 오로지 독서만이 탈출구다. 하지만 책을 덮자마자 다시 목구멍이 죄어온다. 

-229p.

 

 

 이 책은 모드의 개인적인 기록이지만, 모드가 겪는 폭압은 어른들이 지배하는 세상의 폭력을 연상하게 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 경험했고, 어쩌면 이제는 우리 자신이 행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어른의 권력'을. 과거에 갇히지 않으려면 우리는 필사적으로 좋은 어린이 되어야 한다. 모드의 이야기를 읽으면 그럴 용기가 솟는다.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밝은 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누구도 다시는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334p. 스스로를 구해낸 어린 소녀의 용기. 김소영의 추천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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