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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5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입술을 다문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인선의 옆얼굴을 나는 보았다. 특별한 미인이 아니지만 이상하게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녀가 그랬다. 총기 있는 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성격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어떤 말도 허투루 뱉지 않는, 잠시라도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 때문일 거라고. 인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혼돈과 희미한 것, 불분명한 것들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과 몸짓에 배어 있었다. -44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육지 말과 다르게 활용되는 동사와 형용사의 어미들이.. 2023. 10. 23.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 한강 산문집 이토록 애써서 하는 일들에 결국은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떠오르는 말이 있다. '우리는 그 성당의 완성을 보지 못한다'는 말.파비앙의 말이다. (아르헨티나 시인)"하나의 성당이 완성되려면 삼사백년씩 걸렸던 성당들 말이야. 거기 하나하나 벽돌을 놓던 인부들...그들은 결코 그들의 생애에 성당의 완성을 보지 못했지." "나는 내 삶이 세월과 함께 단계적으로 나아져왔다고 생각해.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것이 그 전보다 나았고, 이혼한 것이 결혼생활보다 나았고, 그 뒤로 그 시인과의 관계, 그 관계의 청산까지, 나는 조금씩 더 강해져왔어. 비록 나는 지금 이렇게 늙어가고 있지만, 이제는 내가 매우 강하다고 느껴."에란디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왜냐면, 거짓말은 사람을 약하게 하니까. 마치 충치처럼.. 2013. 6. 5.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한강 산문집 얼마전 집 근처 도서관에서 무슨 책을 빌릴까 생각하던 도중 생각난 작가 한강. 이분의 소설은 세편밖에 읽지 않았는데도 왠지 마음에 오래 남은 울림이 있어서 어떤 사람일까 참 궁금했는데 마침 산문집이 있더라. 집어들고 나오는데, 대출담당 직원분이 친절한 얼굴로 이 책엔 씨디도 같이 있다며 찾아서 건네주셨다. 작가 한강이 읊조린 노래의 소박함과 순수함 뒤에 숨어 있는 예술의 열정을 될 수 있으면 손상시키지 않게 애쓴, 행복한 작업이었다는 작곡가 한정림씨. 제일 좋았던 곡은 작가의 목소리로만 이루어진 잘 자라 우리 아기착하게 잘 자라달도 자고 별도 자고집도 자고 길도 자고 엄마는 네 곁에언제나 있단다아침이 올 때까지좋은 꿈속에 잘 자라 우리 아기예쁘게 잘 자라달도 자고 별도 자고집도 자고 길도 자.. 2013. 3. 12.
병원(病院) - 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시집 1948 작가 한강이 어렸을 적 일기장에 베껴 써보았다던 그.. 2013. 3.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