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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박민규

by 장삼도 2013. 9. 16.

겨울은 많은 것들의 이름을 뺏어간다고 눈을 맞으며 나는 생각했다. 줄기와 가지만 남아 그저 알 수 없는 <나무>들과, 지명마저 사라진 듯 새하얗던 오솔길...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나는 이름 모를 그 길 위를 걷고 또 걸었다. 다만 조금씩 서로의 손이 따뜻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1)


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를 사랑한다는 오해, 그는 이렇게 다르다는 오해, 그녀는 이런 여자란 오해...(중략)

사랑을 이룬 이들은 어쨌든 서로를 좋은 쪽으로 이해한 사람들이라고, 스무 살의 나는 생각했었다. (15)


정말... 정말로 부끄러웠던 적이 있나요? (중략)

인간은 누구나 <루돌프의 코>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놀려대고 웃어도 산타는 오지 않는다. (25)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한다.

말을 쉬게 하려는 것도, 자신이 쉬려는 것도 아니었다.

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려주는 배려였다. 

그리고 영혼이 곁에 왔다 싶으면

그제서야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39)


어쨋거나 이것이 내가 아는 아버지의 전부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내면은 코끼리보다 훨씬 큰 것이고, 인간은 결국 서로의 일부를 더듬는 소경일 뿐이다. (45)


인간의 외면은 손바닥만큼 작은 것인데, 왜 모든 인간은 코끼리를 마주한 듯 그 부분을 더듬고 또 더듬는 걸까? 코끼리를 마주한 듯 그 앞에서 압도되고, 코끼리에 짓밟힌 듯 평생을 사는 걸까? 한눈에 홀려가지고 저렇게 된 거 아니겠니. (48)


오이의 여신이 지켜주는 사십대 중년의 싱그런 근육 (50)


인간의 안목은 그런 것이다. 죽음이 닥치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 사람에게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는다. 아, 그것이 사라졌구나. 사라져가는구나... 느낀 후에야 그 텅 빈 공백을 바라보며 비로소 중얼거릴 뿐이다. 실례지만

이곳에 예전에 코끼리 같은 게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군요, 저기 똥이 있는 걸로 봐서는. 

확실히 있었습니다, 우리의 크기를 보세요, 더군다나 이 쇠창살을.

그나저나 이 창살은 매우 차가워졌군요.

예전엔 이렇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있던 코끼리와 아는 사이신가요?

말하자면... 저는 이 창살 사이로 비스킷을 준 적도 있습니다.

한 번?

아니 여러 번.

여러 번이라니 더욱 그랬던 것 같군요, 이곳에 코끼리가 있었음을...

바로 이곳에 있었습니다.

똥도 크군요. (53)


립서비스처럼 느껴지는 의례적인 위로의 말이... 그러나 인간에겐 없어선 안 될 소중한 것임을 안 것도 그때였다. (53)


그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종착역에 이를 때까지 지차에서 내리지 못하는 인간처럼, 인생의 어느 지점까지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일부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54)


누군가가 너를 부르고 

너는 아주 천천히 대답한다.(117)


이 포크를 봐. 앞에 새 개의 창이 있어. 하나는 동정이고 하나는 호의, 나머지 하나는 연민이야. 지금 너의 마음은 포크의 손잡이를 쥔 손과 같은 거지. 봐, 이렇게 찔렀을 때 그래서 모호해지는 거야. 과연 어떤 창이 맨 먼저 대상을 파고 들었는지... (122)


김이었어?

아니 시금치였어요. (중략)

언젠가 그 친구가 김이었냐고 물으면 말이야... 김이라고 그래. 설사 그것이 시금치였다 하더라도 말이야. (130)


장담컨대 두 사람은 모두 똥을 누면서 그날의 원고를 구상했을 거야. 두 작가를 키운 것은 똥이었지. 글을 읽어보면 알 수 있어. 까뮈는 설사였고, 카프카는 변비였어.(136)


이런 식이었다. 어우동, 뽕, 백 투 더 퓨처, 13일의 금요일... 어떤 게 좋을까? 누구라도 백 투 더 퓨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37)


비틀즈의 썸씽 (중략) 그녀의 미소 속엔 무언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죠? (139)


그런 일을 겪을 땐 언제나 못 박힌 듯 몸이 얼어붙었으니까... 사람의 웃음이... 창처럼 사람의 배를 찌를 수 있다는 걸 믿으세요? 믿어... 하고, 나는 뿔이 잘린 트리케라톱스처럼 고개를 끄덕였었다. 결국, 세상의 매듭을 푸는 것은 시간이다. (140)


등 뒤의 검은 액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술을 마시면서도... 이렇듯 웃고 떠들어선 곤란한 게 아닌가, 기분이 들곤 했었다. 하하,하. (143)


크게 달라진 생활도 아니었어. 냉장고는 그대로 있었으니까. 그 때 알았지. 내겐 줄곧 냉장고가 엄마였다는 사실을 말이야. (중략) 학교에서 돌아오면 밥을 주는 것도... 간식과 우유를 주는 것도 냉장고였던거야. (중략) 그래서 엄마를 땅에 묻는 것보다 말이야... 냉장고 속이 텅 비거나 정전이 되어 그 속의 불빛... 그 빛이 보이지 않으면 더 슬퍼지는 인간이야, (149)


인간은 과연 실패작일까, 인간은 과연... 성공작일까? 실패와 성공의 기준은 무엇일까... 인간은 과연 달의 이면을 볼 수 있을까? 인간은 과연... 스스로의 이면을 볼 수 있을까. 인간은 어떻게 달까지 갈 수 있었을까? 달 위를 걸어다닌 인간조차도, 그러나 스스로의 내면에는 발을 내리지 못한 채 삶을 마치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아무 일 없이, 아무 일 없는 듯 돌아오던 새벽의 골목길에서

그리고 인간은

실패작과 성공작을 떠나, 다만 <작품>으로서도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생각했었다.(152)




그 사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지금의 후회를 조금은 줄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결국 <그때>의 인간처럼 무능한 인간은 없다.(217)


보잘것없는 인간일수록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세상을 사는 거라구.(219)


-말하자면 소인이 찍힌 그녀의 편지를 받았다, 언제든 열어볼 수 있는 편지가 지금 책상 위에 놓여 있다... 는 사실 자체가-내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란 기분이 들어서였다. 섣불리 물통의 마개를 열지 못하는 불시착한 조종사처럼, 나는 말없이 주변의 사막을 바라본 뿐이었다.(262)


이 정도는 몰아야... 이 정도는 벌어야... 결국 이 정도는 살아야 - 사는 구나, 소리를 듣는 세상이었다. 평균을 올리는 것은 누구인가... 또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나는 생각했었다.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이었다. (308)


기억하는 편지의 마지막 문장 역시 다음과 같이 짧고, 간결한 두줄의 문장이었다. 오로지 진실인 이유로 평범할 수밖에 없는 문장들이었다.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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