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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이틀 - 장정일

by 장삼도 2015. 9. 20.

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곳 그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그 구월의 하루를

나는 숲에서 보냈다 비와

높고 낮은 나무들 아래로 새와

저녁이 함께 내리고 나는 숲을 걸어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뭇잎사귀들은

비에 부풀고 어느 곳으로 구름은 

구름과 어울려 흘러갔으며


그리고 또 비가 내렸다

숲을 걸어가면 며칠째 양치류는 자라고

둥근 눈을 한 저 새들은 무엇인가

이 길 끝에 또 다른 길이 있어 한 곳으로 모이고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모래의 강물들


멀리 손을 뻗어 나는

언덕 하나를 붙잡는다 언덕은

손 안에서 부서져

구름이 된다


구름 위에 비를 만드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있어 그 잎사귀를 흔들어

비를 내리고 높은 탑 위로 올라가 나는 멀리

돌들을 나르는 강물을 본다 그리고 그 너머 더 먼 곳에도

강이 있어 더욱 많은 돌들을 나르고 그 돌들이

밀려가 내 눈이 가닿지 않는 그 어디에서 

한 도시를 이루고 한 나라를 이룬다 해도


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나의 구월이 있다

구월의 그 이틀이 지난 다음

그 나라에서 날아온 이상한 새들이 내

가슴에 둥지를 튼다고 해도 그 구월의 이틀 다음

새로운 태양이 빛나고 빙하시대와 

짐승들이 춤추며 밀려온다 해도 나는 

소나무숲이 감춘 그 오솔길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을 본다



(.....)


 "이 운율적인 시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쉴 새 없는 '운동'과 거기에 무심한 부동의 '정지'가 서로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거죠. 자, 한번 열거해볼까요, 그 쉴새 없는 운동을?"

 그러면서 교수는 시 속에 나열된 차례대로 '감춘다, 내린다, 부푼다, 자란다, 모인다, 되돌아간다, 뻗는다, 부서진다, 만든다, 흔든다, 올라간다, 나른다, 본다, 나른다, 밀려간다, 이룬다, 날아온다, 튼다, 빛난다, 춤춘다'와 같은 동사를 쭉 열거했다. 

 "한 마디로 이 시는 국어사전에 등재된 동사들이 총출동된 형국입니다. 하지만 그 숨 가쁜 운동 속에서 묘하게 정지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저 모든 동사들의 공격 앞에서도 끄덕하지 않는 것?"

 60여 명의 학생들 가운데 '소나무 숲'이라고 대답한 학생은 꽤 있었지만, 교수가 원하는 답을 제대로 짚은 사람은 없었다. 교수의 질문에 유일하게 답한 사람은 은이었다.

 "이틀입니다."

 "왜 그냥 이틀이지? 구월의 이틀이 아니고?"

 "저 시를 보면, 그 이틀이 꼭 구월의 이틀이 아니어도 상관없이 떄문입니다."

 "그래. 맞다. 네 일므이 뭐냐?"

 "은입니다."

 이렇게 해서 금은 은의 이름을 알게 됐다.

 "맞습니다. 이 시 속의 화자는 오로지 이틀에 못 박혀 있습니다. 새로운 도시가 서로 나라가 만들어질 동안, 아니, 빙하시대가 새로 등장할 만큼 압도적인 시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시적 화자는 한갓된 구월의 이틀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 배짱 좋은 시적 화자는 대체 무얼 믿고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만 갖고서 영겁에 맞섰던 걸까요? 영겁과도 맞바꿀 수 없는 그 이틀을 우리는 원체험이나 각성의 순간, 또는 시적 화자가 간직한 정신적 외상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이 시의 시적 화자에게 그 이틀은 절대적인 것이며,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시 속의 이틀은, 우리에게 두 가지 비의를 가르쳐줍니다. 구월은 30일이나 되지만 시인이 이 시를 쓰는 데는 단지 이틀만 필요했다는 것. 나는 이 대목이 문학에 관한 어떤 비밀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많은 어른들은 '내가 살았던 것을 그대로 적으면 소설 몇권 분량이 된다'고 말하는데, 육십 평생의 행적이 몇 권 분량의 다큐멘터리는 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소설'로 화하지는 않습니다. 예술은 우리의 원체험, 각성의 순간 혹은 내면에억압된 정신적 상처와 같은 숨어 있는 이틀을 끄집어내는 것이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나열하는 게 아닙니다. 이게 '현대문학의 이해'를 여러분께 가르쳐야 하는 내가, 이 시로부터 찾아낸 문학의 비밀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문학은 내 삶을 구구절절이 받아 적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내 삶이 망각해버린 이틀, 혹은 내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2인치를 찾아내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