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회용 인생

p.11

엄지로 화면을 위로 튕겨 올리는 동안에는 잠시 생의 일회성이라는 참을 수 없는 무거움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지속될까? 인생이 일회용인 것도 힘든데, 그 인생은 애초에 공평치 않게, 아니 최소한의 공평의 시늉조차 없이 주어졌다. 

 

엄마의 비밀

p.20

인생은 중간에 보게 된 영화와 비슷한 데가 있다. 처음에는 인물도 낯설고, 상황도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그럭저럭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씩 짐작하게 된다. 갈등이 고조되고 클라이맥스로 치닫지만 저들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무슨 이유로 저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명확히 이해하기 어렵고, 영원히 모를 것 같다는 느낌이 무겁게 남아 있는 채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바로 그런 상태로 우리는 닥쳐오는 인생의 무수한 이벤트를 겪어나가야 하고 그리하여 삶은 죽음이 찾아오는 그 순간까지도 어떤 부조리로 남아 있게 된다. 

 

우물 정 자 천 개

p.48

'회계원리' 첫 수업에서 '회계는 경영의 언어'라는 말을 들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언어는 문학의 언어였다.

그 언어는 모호하다. 이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저것을 말하고, 저것을 말하면서 이것을 말한다. 때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언어이며, 사람에 따라 무한히 다르게 해석된다. 회계가 그랬다가는 큰일이 날 것이다. 그런데 문학은 그래도 된다. 

그래서 좋았다. 

 

기대와 실망의 왈츠

p.61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기대와 실망이 뱅글뱅글 돌며 함께 추는 왈츠와 닮았다. 기대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면 실망이 한 발 뒤로 물러나고 실망이 오른쪽으로 돌면 기대도 함께 돈다. 기대의 동작이 크면 실망의 동작도 커지고 기대의 스텝이 작으면 실망의 스텝도 작다. 큰 실망을 피하기 위해 조금만 기대하는 것이 안전하겠지만 과연 그 춤이 보기에도 좋을까? 

p.63

제사는 산 자들이 정색하며 공연하는 한 편의 연극이며 주제는 기억이다. 

 

테세우스의 배

p.72

인간은 보통 한 해에 할 수 있는 일은 과대평가하고, 십 년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과소평가한다는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새해에 세운 그 거창한 계획들을 완수하기에 열두달은 너무 짧다. 그러나 십 년은 무엇이든 일단 시작해서 띄엄띄엄 해나가면 어느 정도는 그럭저럭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p.75

전반적으로 나는 이십대의 내가 만났다면 재수없어했을 사람으로 변한 것 같다. 왜 그렇게 많이 변했냐고 누가 물으면 별로 할말이 없다. 잘 모르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는 영웅 테세우스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돌아올 때 타고 온 배 이야기가 나온다. 

서른 개의 노가 달려 있었던 테세우스의 배는 아테네인들에 의해 데메트리오스 팔레우스의 시대까지 유지 보수되었다. 썩은 널빤지를 뜯어내고 튼튼한 새 목재를 덧대어 붙이기를 거듭하니, 이 배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끝없이 변화하는 것들에 대한 논리학적 질문'의 살아 있는 예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배가 그대로 남았다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배가 다른 것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테세우스의 배'는 조금씩 변했지만, 법과 권위, 대중의 동의가 그 배가 테세우스의 배임을 인증해주었기에 계속 테세우스의 배로 남을 수 있었다. 인간은 평생에 걸쳐 테세우스의 배보다 더 큰 변화를 겪는다. 이십대의 나는 길에서 마주쳐도 지금의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나 역시 십대의 나를 그냥 지나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 사람이 과거의 그 사람과 같은 존재라고 애써 믿으며 살아간다. 변하지 않는 어떤 것들을 애써 찾아내, 사람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세포 차원에서, 호르몬의 차원에서, 엔트로피의 차원에서 나는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다. 

p.79

살아오면서 알던 이들의 변신을 많이 보아왔다. 그들의 변화를 접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그걸 설명할 수 있는 '도발적 사건'을 찾곤 했다. 누군가의 변절, 누군가의 타락, 누군가의 성공, 누군가의 추락, 누군가의 돌변을 말할 때 '걔가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그 일이 있고 나서...' 로 설명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러지 않으려 노력한다. 우주의 만물이 그러하고, 내가 그러했듯, 그럴듯한 이유 없이도 인간은 얼마든지 변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오히려 변화보다 더 어려운 것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니 이 자연스러운 결과에 굳이 '도발적 사건'을 갖다붙여 설명할 필요는 없다. 모든 지도에 축척이 있듯이 실제 세계는 이야기의 세계를 초과한다. 다만 이해가 잘 되지 않을 뿐. 

 

모른다

p.99

세상에는 나를 대신해서 나를 보아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나의 어떤 면을 문자 그대로 보고, 생각하고, 이해한다. 그리고 관계를 지속한다. 물론 나도 나를 보기는 한다. 그러나 셀카를 찍듯이 본다. 자주 보는 면을 괜찮게 보이는 각도로 본다. 정수리나 발, 걸음걸이와 자세를 보지 않는다. 

p.102

어린 시절의 일기에는 '나'에 대한 말들로 가득했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일까를 알기 위해 애썼던 십대의 내가 거기 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라는 존재가 저지른 일, 풍기는 냄새, 보이는 모습은 타인을 통해서만 비로소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천 개의 강에 비치는 천 개의 달처럼, 나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타인의 마음에 비친 감각들의 총합이었고, 스스로에 대해 안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은 말 그대로 믿음에 불과했다. 

 

이탈

p.135

신분을 속이거나 없는 교양을 꾸며내서라도 더 높은 사회적 존중을 얻으려는 인물들의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은 여전히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어떤 불안을 건드린다. 그 목소리는 이렇게 속삭인다. 너는 교양인의 흉내를 잘도 내고 있구나.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너는 아직 충분하지 않아. 너는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그런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나는 여지없이 그 동기의 연구실로 소환된다. 모르는 성악가가 모르는 언어로 모르는 노래를 부르는 그 방의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 교양인의 관용과 너그러운 미소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어딘가 잘못된 곳에 와 있고,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로 다시 '이탈'해야만 할 것 같은 이 익숙한 충동은 여전히 내 안에 있다. 

 

사공이 없는 나룻배가 닿는 곳

p.142

가르쳤던 학생들 중 몇몇은 작가가 되었는데 그중에 내게 가능성 같은 것을 물으러 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묻지 않고 그냥 썼다. 그들은 자기 미래가 궁금하지 않았을까? 많이 궁금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쓰는게 좋고 작가가 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 계속 썼을 테고, 쓰다보니 작가도 되었을 것이다. 그들도 지금은 나처럼 "언제 작가가 될 거라고 생각하셨나요?"라는 질문을 받고 있을 것이다. 

사공 없는 나굿배가 기슭에 닿듯 살다보면 도달하게 되는 어딘가, 그게 미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먼 미래에 도달하면 모두가 하는 일이 있다. 결말에 맞춰 과거의 서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무용의 용

p.141

잘라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나무라 자르지 않았다는 나무꾼의 말에 장자는, 이 나무는 쓸모가 없어 천수를 다할 수 있었다고 제자에게 설명하기도 한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도 아니고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도 아니다. 살아남은 자는 그냥 살아남은 자이고, 그 이유와 방법도 어쩌면 자신만 알거나 아니면 자기도 모를 것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지만 그들이 인생이라는 게임을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남아 여기까지 와 있는지 속속들이 알 도리가 없다. 일부러 2등에 머물거나 확고한 신념으로 '잘라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나무'로 존재하는 이들이 내 주변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것에 대하여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나의 이십대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로 시작하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외우는 이들과 함께였다. 그 시는 이렇게 끝난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강한 자는 살아남는다"/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살아남은 자들이 부끄러워하던 시대는 가고, 곧 1등이든 2등이든 무조건 살아남는 것이 최선이라는 시대가 왔다. 지금은 너를 떨어뜨리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오직 단 한 명만이 살아남는다는 '오징어 게임', 서바이벌 게임의 세계관이 스크린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은밀히 믿고 있다. 액정화면 밖 진짜 세상은 다르다고. 거기에는 조용히, 그러나 치열하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남아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싸우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인생의 그래프

p.160

인생의 성패를 판단하는 곡선은 하나가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다. 세속적 성공과 도덕적 파탄이 함께 올 수 있으며 사랑과 꿈이 엇갈릴 수 있다. 어쩌면 한두 개의 선으로 나타낼 수 없을 수도 있다. 삼각함수를 배울 때, 가장 신기했던 것은 건조한 수식으로 이루어진 방정식이 좌표상에서 꽃이나 나비 같은 아름다운 곡선으로 표현되는 부분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의 곡선은 어떤 모양으로 그려지고 있을까? 그 선들을 만든 함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떤 충동과 어떤 운이었을까? 

 

도덕적 운

p.181

자기파괴적 충동을 타고난 것은 불운이었지만,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내 '도덕적 운'이었다. 그냥 흘러가게 두었을 때, 삶은 자연스럽게 악몽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악몽을 문장으로 옮겨 쓰기 시작하고 나서야 내 안의 어둠은 조금씩 질서가 있는 이야기로 변화하기 시작했고, 나는 핸들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비로소 주변의 세상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도덕적 운 - 좋은 이야기에선 인물이 상황에 따라 선인이 될 수도, 악인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위안

p.189

삶을 사유하다보면 문득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토록 소중한 것의 시작 부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시작은 모르는데 어느새 내가 거기 들어가 있었고, 어느새 살아가고 있고, 어느새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소설이나 영화는 시작 부분에 공을 많이 들인다. 첫인상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내 삶이라는 이야기에 첫인상이랄 게 없다. 숙취에 절어 깬 아침 같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 기분. 내 삶의 서두는 기억이 나지 않는 반면, 나와 무관한 다름 삶들은 또렷하고, 그것들은 대부분 소설이나 영화에 담겨 있는 것들이다. 

p.191

물리학 쪽 책을 보다가, 이해는 잘 못하면서도 문득 위안을 받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은 그저 지구상의 인간을 위한 편의적 개념일 뿐이라는 설명이 그렇다. 또한 시간은 우리가 우주의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다 다르고, 어쩌면 거꾸로 흐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같은 것. 내가 다른 삶을 상상하거나 거기에 매혹되는 이유는 어쩌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불가역한 시간이라는 개념에 익숙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여기에서 벗어난다면 좀더 편안하게 미지의 미래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미래처럼 보이는 과거일 테니까. 이미 일어난 일인데 내가 아직 모를 뿐이니까. 크리스마스 날 아침까지 풀지 못하는 선물처럼, 놀라움을 위해 알려주지 않는 것뿐일테니까. 그리고 어떤 세계에서는, 그것이 다른 차원이든 '사건의 지평선' 너머든, 아버지와 엄마는 죽지 않았고, 나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내가 그들의 부모였을 수도 있다. 그 밖에도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내 삶이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무한한 삶들 중 하나일 뿐이라면, 이 삶의 값은 0이며(1/∞=0) 아무 무게도 지니지 않을 것이니, 존재의 이 한없는 가벼움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더는 단 한 번의 삶이 두렵지 않을 것 같다. 태어나지 않았을 때 나는 내가 태어나지 않은 것을 몰랐기에 전혀 애통하지 않았다. 죽음 이후에도 내가 죽었음을 모를 것이고, 저 우주의 다른 시공간 어디엔가는 내가 존재했는지도 모르는 내가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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