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흡입력있고 따뜻한 이야기를 음악으로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글을 써주신 김애란 작가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시작하는 주말 오전이다.



11p.
-옛날 옛날에…
-세상에 아무것도 없던 때…
-신은 밤을 만들었어요. 그러곤 뭔가 허전해 고민하다 자신의 엄지 끝에 침을 묻혔습니다. 그런 뒤 그 엄지로 하늘 한 곳을 문질렀어요. 그러자 마침내 그 안에서…
-빛이 새어나왔습니다.
당시 피로와 허무에 절어 살던 지연도 이 대목을 읽을 때만큼은 힘을 주어 연극적인 효과를 냈다. 그러곤 어린 지우의 눈썹에 엄지를 댄 뒤 장난치듯 꾹 눌러댔다. “빛이 나왔습니다”하고. “낮이 생겼습니다”하고. 그래서 지우는 훌쩍 자란 후에도 학교 운동장에 땅거미가 질 때면, 지겨움과 무서움이 분간되지 않고 최근 세상을 떠난 엄마가 몹시 그리워질 때면,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제 눈썹을 꾹 눌러보는 아이가 되었다. 어느 때는 그것만으로는 마음이 달래지지 않아 스스로 이야기를 짓는 아이가.

이를테면 이런 식의.

옛날 옛날에
세상에 자비도 없고 희망도 없고 노래도 없던 때
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첫날 자신이 만든 밤이 너무 좋아서.
그 밤을 덮고 자느라
세상에 인간은 있되
구원도 없고 기적도 없고 선의도 없다는 걸 잊었습니다.
첫날 자신이 만든 밤이 너무 좋아서.
자신이 만든 밤이 너무 편해서.

43p.
용식을 키우기 전에는 ‘먹이에게도 먹이가 필요하다’는 단순한 사실조차 몰랐다. ‘먹이‘도 식성과 취향이 있고, 똥도 싸고, 아프기도 한다는것도.

51p. 반박자
-이모는 잘해줘?
채운이 반박자 늦게 대꾸했다.
-그럼

129p. 엄마인 선들
긴 투병 기간 동안 엄마 몸은 계속 달라졌다. 장기는 물론이고 몸의 전체적인 선과 색이 변해갔다. 평소 엄마 모습을 많이 그려온 소리는 그걸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아픈 엄마를 그리다 말고 종종 손을 멈췄다. 소리는 엄마가 떠난 뒤에도 엄마 얼굴을 자주 그렸다. 엄마의 눈동자에 고인 빛을 표현할 땐 더 공을 들였고, 어깨선을 다듬을 땐 실제로 엄마를 쓰다듬는 것처럼 했다. 그렇게 한때 엄마였거나 여전히 엄마인 선들을 좇으며 손끝으로 엄마를 만졌다. 그런 식으로 엄마를 한 번 더 가졌다.

130p.
손에 이상을 느낀 뒤로 소리는 그림에 대한 자신감을 더 잃어갔다. 그림이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 아닌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는 수단이 되다보니 그랬다. 그런데 최근 지우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며 소리는 자신이 오랜 시간 잊고 지낸 재미와 기쁨을 느꼈다. 내가 특별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과 무언가를 나누고 싶어 그리는 그림은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136p. ’가정‘
정말이지 채운은 그 긴장이 지긋지긋했다. 그 어느 곳보다도 편안하지 않던 곳, 현관문 앞에서 늘 크게 다짐하며 들어가야 했던 곳이 채운에게는 ’가정‘이었다.

152p.
정작 사랑하는 뭉치에게는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러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가슴 저렸다. 진자 내 가족은 뭉치인데 어떤 거대한 연극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159p.
수업 주제는 ’최고의 날the best day’이고, 발표자는 소리였다. 수업중 갑자기 지목당한 소리는 당황하다 곧 자기 글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나는 그녀와 산책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연미정입니다.
내 ‘최고의 날’, 내게 일어난 일은 이렇습니다.
내가 말하면 그녀가 듣습니다. 그녀가 얘기하면 내가 듣습니다.
우리는 함께 웃습니다.
그곳에 큰 사건은 없습니다.
대신 그녀가 있습니다.

소리는 문장을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썼다. 그 일이 마치 지금 눈앞에서 다시 벌어지기라도 하는 양. 게다가 그 글에는 접속사가 없었다. 자신은 속임수를 쓰지 않는다며 상대에게 빈 손바닥을 활짝 펼쳐 보인 채 게임을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179p. 그런 데 들어오기라도 한 양
무엇보다 그 사람은 나를 늘 존중해줬어. 나는 그 사람이 나와 마주앉았을 때 활짝 벌어지던 동공과 꼿꼿이 선 척추가 좋았어. 그 반듯한 태가. 왜 우리가 성당에 들어가거나 콘서트홀에서 교향곡을 들을 때 자세를 바로 하게 되잖아? 그 사람은 마치 자기가 그런 데 들어오기라도 한 양 나를 대했어. 그즈음 나는 집에서 늘 긴장했는데 그 사람 앞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어. 어느 땐 옆에 있으면 한없이 잠이 쏟아졌지. 며칠이고 함께 긴 잠을 자고 싶을 만큼.

200p.
지우가 이해하기로 지우개는 뭔가를 없앨 뿐 아니라 ‘있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대상에 빛을 드리우고 그림자를 입힐 때 꼭 필요했다. 그 대상이 사물이거나 인물, 심지어 신일때조차 그랬다. 누구든 신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서는 신의 얼굴을 조금 지워야 했다. ‘광원’, 즉 빛이 출발한 곳을 먼저 파악해 빛이 닿는 곳은 어둡게, 그렇지 않은 데는 밝게 표현하는 게 기본이었다.

225p. 선호와 지우의 ‘이중 하나는 거짓말’
-그러니까 다섯 개 중 네 개는 진실을 말하고, 나머지 하나는 반드시 거짓으로 꾸며야 한다는 거지?
-네.
-그게 다야?
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호가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내가 먼저 시작할게.
얼결에 게임에 참여하게 된 지우가 당황하는 사이 선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나는 어릴 때 아버지에게 맞고 자랐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렇지만 지우는 위화감을 느꼈다. 아저씨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모르겠는데도 그랬다. 상대가 불쑥 어떤 선을 침범한 기분이었다. 자기소개에 쓸 수 있는 수많은 정보 중 아저씨가 굳이 왜 그런 화제를 꺼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선호의 다음 말은 지우를 더 놀라게 했다.
-나는 아버지가 일찍 죽어 다행이라 생각한 적이 있다.
-…
지우는 게임에 동참한 걸 점점 후회했다. 아저씨가 하는 말이 부담스럽거나 극적이어서만은 아니었다. 왠지… 진실일 것 같아서였다. 대체 누가 저런 걸 거짓으로 꾸며낸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그만하자 할까?’
지우가 갈등하는 사이 선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직장에서 잘리지 않으려고 동료를 배반한 적이 있다.
‘거짓’
지우가 처음으로 아저씨의 말이 거짓임을 확신했다. 그 일화만큼은 엄마에게 여러 번 들어 알고 있어서였다. 그때마다 엄마는 아저씨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강조하곤 했다. 동시에 지우는 지금까지 아저씨가 한 말이 왜 그렇게 불편하게 다가왔는지 깨달았다. 이 게임의 목적은 얼핏 ‘거짓 가려내기’ 같지만 실제로 이 게임에서 중요한 건 ‘누구나 들어도 좋을’ ‘아무에게나 말해도 되는’ 진실만 말하는 거였다. 당연했다. 누구도 초면에 무거운 비밀을 털어놓지는 않으니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피하는 게 상책이란 걸 어린 지우조차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선호는 지우의 반응 따위 아랑곳 않고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너희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
지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선호는 운전대를 잡은 채 차분히 정면을 응시했다. 잠시 후 선호가 다섯 개의 자기소개 문장 중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나는 너랑 살게 돼 기쁘다.
-…
선호가 지우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듯 잠시 침묵한 뒤 입을 열었다.
-이중 뭐가 거짓 같아?

232p.
‘하지만 삶은 이야기와 다를 테지. 언제고 성큼 다가와 우리의 뺨을 때릴 준비가 돼 있을 테지. 종이는 찢어지고 연필을 빼앗기는 일도 허다하겠지.’ 누군가 집을 떠나 변해서 돌아오는 이야기, 지우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알았다. 하지만 그 결말을 잘 믿지는 않았다. 누군가 빛나는 재능으로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 재능이 구원이 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에 몰입하고 주인공을 응원하면서도 그게 자신의 이야기라 여기지는 않았다. 지우는 그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래도 괜찮음을 알려주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떠나기, 변하기, 돌아오기, 그리고 그사이 벌어지는 여러 성장들. 하지만 실제의 우리는 그냥 돌아갈 뿐이라고, 그러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당시 자기 안의 무언가가 미세히 변했음을 깨닫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 삶의 나침반 속 바늘이 미지의 자성을 향해 약하게 떨릴 때가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그런 것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는데다 거의 표도 안 나는 그 정도의 변화도? 혹은 변화 없음도? 지우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다만 거기에는 조금 다른 이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지우는 그 과정에서 겪을 실망과 모욕을 포함해 이 모든 걸 어딘가 남겨둬야겠다 생각했다. 그런 뒤 저쪽 세계에서 혼자 외롭고 두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엄마와 용식에게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래전 엄마가 자신에게 늘 그래줬듯이. 활짝 펼친 그림책 앞에서 한 손으로 자신의 눈썹을 꾹 누르며 “빛이 나왔습니다” “낮이 생겼습니다”라고 해주었듯이. 아무리 같은 줄거리가 되풀이돼도 항상 새롭게 놀라는 척해주었듯이 말이다.

234p.
지우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를 보며 언젠가 작문 시간에 국어 선생님이 읽어준 시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비교적 짧은 시였는데도 다른 건 전혀 기억 안 나고 오직 한 문장만 또렷이 떠올랐다.

꿈에서 나는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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