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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인터뷰

제임스 폴 지 교수 인터뷰

by 장삼도 2011. 3. 25.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중얼거림이 끊이지 않았지만,
현실은 게임회사의 일개 사원.
좋아하는 음악 작업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걸 변명삼아 
사실은 나도 모르게 사회에 해악(=_=)을 끼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늘 있었다.

그런 내게 한 줄기 희망을 던져준 인터뷰가 있었으니...

그렇다, 게임이 꼭 죄다 때려 부수고 죽이고 이런 폭력적인 것만 있으란 법은 없다.
어쩌면 나는 게임회사에 다니면서도 넓은 시야를 가지지 못하고 게임의 어두운 면만을 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눈을 들어보니,
이미 비폭력 대안게임(기능성 게임)의 장은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이 할아버지 교수님의 말처럼 좋은 사회적 교육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듯



출처: MBC news 게임이 학교다 (http://imnews.imbc.com/fullmovie/fullmovie05/child/2588716_6631.html)

교수님은 어떻게 게임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나요?

저는 게임 분야의 전문가는 아닙니다. 그저 관심이 많은 사람일 따름이죠. 저도 처음엔 게임을 전혀 몰랐습니다. 오히려 교육과 언어에 관심이 있었죠. 조카 녀석이 게임을 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다가 한번 배워볼까 싶었죠. 그런데 이게 하면 할수록 정말 어려운 겁니다. 특히 저처럼 나이든 사람에게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규칙들 투성이였죠. 대체 이 어려운 것들을 다들 어떻게 저렇게 잘한단 말인가? 그런데 바로 거기서 흥미로운 점을 깨달았습니다. 교육과 게임이 하는 고민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요. 두 분야 모두 어떻게 하면 어렵고 복잡한 것을 쉽고 자연스럽게 익히게 할까?’라는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게임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연구 대상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게임 문화는 미국과는 차이가 많은데, 어떤 점에 흥미를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흥미롭게 지켜본 점은 ‘PC입니다. 미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콘셉트의 사업을 확장시켜보려 헀지만, 전혀 성공하지 못했죠. 한국인들이 ‘PC에서 일종의 사회•문화적 관계를 맺는다는 부분이 상당히 재미있어요. 게임으로 경쟁을 시키는 프로게임 문화도 미국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관심이 갑니다. 서울에서 직접 관람한 스타크래프트 토너먼트가 한 예입니다. 그래픽적인 부분에서는 지금의 다른 게임들보다 뛰어날 게 전혀 없지만, 당신이 프로 게이머라면 전혀 이 부분에 신경 쓰지 않죠. 프로게이머는 다른 문제에 집중하게 됩니다. 상징이나 룰을 이용한 전략이 바로 그것이죠. 이런 방식으로 게임을 하는 게이머들을 바라보는 것은 현란한 그래픽보다 훨씬 흥미진진합니다. 결국 게임은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스포츠라고 볼 수 있고, 때로는 미식축구나 체스보다도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스포츠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이런 정신적 스포츠가 미국에는 아직 대중화되지 않았는지 의문으로 남네요. , 한가지 더 재미있었던 것은 프로게임 현장에서 만날 수 있었던 관중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프로게이머들이 어떤 경기를 펼치고 있는지 모두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미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죠. 미국인들은 아마 거의 프로게이머의 경기 방식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라스베이거스와 같이 특별한 지역에서는 이벤트 형식으로 비슷한 경기들이 이뤄질 수 있겠지만, 그것도 모두 일회적인 이벤트에 지나지 않습니다. 게이머들도 일부러 여성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고요. 섹슈얼리티를 앞세운 마케팅 프로모션은 있지만, 한국에서와 같이 ‘e스포츠로서 인정받고 있진 않아요.

 

게임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 있으신가요?

미국에서는 대중문화를 통해 철학적인 접근을 하려는 경향이 꽤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저또한 최근에 그런 선상에 있는 글을 쓴 적이 있죠. 그렇게 본다면 게임을 가지고 무엇이든, 거의 모든 이슈에 대입해 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요즘 많은 상업적 게임들이 윤리적인 이슈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 게임을 하다 보면 게이머는 수없이 많은 윤리적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과 맞닥뜨립니다. 최근 나온 게임 중 헤비 레인Heavy Rain’이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게이머가 직접 게임 내에서 스토리텔링을 하는 게임인데요, 게이머는 캐릭터를 결정하고 그 캐릭터들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 게이머는 매번 윤리적인 결정을 내리죠. 이건 상당히 감성적인 체험이기도 합니다. 책이 보여주는 스토리텔링과는 많이 다르죠. 책을 통해선 이미 세팅이 된 결정들을 읽기만 하지만, 이 게임 안에서는 자신이 직접 만든 결정이 가져오는 결과를 스스로 목도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물리적인 버튼 하나만 눌렀을 뿐인데, 캐릭터와 그들의 삶이 바뀌는 걸 체험하는 겁니다. 또 다른 신세계가 펼쳐진 셈이죠. 게이머는 조물주와 같은 능력을 가지게 된 거고요. 저는 이렇게 게임을 통한 감정적 체험이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게임 속 세계에 몰입하다 보면, 그 게임의 목적과 의미를 성찰하는 건 어렵지 않을까요?

글쎄요. 전 두 가지 다 가능하다고 봅니다. 물론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세세한 부분들에 정신이 팔리겠죠. 그러나 어느 정도 게임의 룰에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심시티Sim City’와 같은 도시 계획 게임Urban Planning Game도 같은 맥락이겠죠. 게이머는 그 속의 캐릭터를 조종하지만 동시에 신의 위치에서 전체적인 그림을 보게 됩니다. 이건 과학자가 실험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전기자체에 집중하고 그 안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지 살피지만, 그 다음엔 잠시 뒤로 물러나서 전체적인 영역 안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는 거죠.

 

게임이 일으키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선 어떻게 보시나요?

문제는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게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요? 매일 종교적 이유로 인해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장담하건대 그에 비해 게임 때문에 사람이 죽거나 해를 당한 케이스는 훨씬 적을 겁니다. 기껏해야 백 건 정도 되지 않을까요? 물론 게임 때문에 사회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건 새로운 현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울 겁니다. 대중은 아직까지 상대적으로 책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죠. 특히 서양권에서 책은 신(하나님)에 의해 쓰여졌다고 믿는 정서가 강합니다. 그런데 게임은 아닙니다. 게임은 신이 만든 거라고 보지 않죠. 아직까지 대개는 게임을 그저 젊은이들이 즐기는 대중문화의 일종이라고 봅니다. 현재 책의 영향력은 상당한데, 게임은 아직 책과 같은 영향력은 없지만 언젠가는 그와 같은 위치에 올라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게임의 영향력이 아직까지 미미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게임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하는 기사가 나오더라도 그렇게 심각하게 놀라운 사건은 아니에요. 지금의 사건들은 일반적인 중독에 의한 범죄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보세요. 얼마나 다양한 중독들이 심각한 결과들을 낳았는지요. 비단 게임의 문제만은 아닌 겁니다. 책에서 중독될 수 있고, 영화에도 중독될 수 있습니다. 게임에 중독되는 이유는 현실의 삶보다 그 안의 삶이 훨씬 행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스타크래프트에 중독된 이는 현식보다 그 안의 세계를 더 동경하는 거죠. 현실에서 당신이 돈을 잃었거나, 직업이 없거나, 힘든 일을 겪고 있는데 게임 안에서 당신은 쉽게 영웅이 됩니다. 그 누구인들 그걸 거부하겠어요? 어쨌든 저는 게임으로 인한 문제들이 다른 영역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전형적인 것이라고 보지 게임 때문에만 일어난 전무후무한 무언가로는 보지 않습니다.

 

사회적 게임Social Game’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게임을 통해서 가치관을 교육시킨다는 시도는 새로운 겁니다. 이런 게임들의 의도는 더 이상 재미가 아닙니다. 교육이죠. 최근 미국에서는 건강과 관련된 이슈를 가진 게임이 몇 개 등장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봤을 땐 상당히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돼요.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고, 게임 모델도 상당히 대중화된 상태입니다. 상대적으로 비슷한 게임을 만드는 경쟁업체도 적죠. 이렇게 게임이 재미를 느끼게 하는 데에서 조금 벗어나 특정한 이슈에 대해서 대중의 관심을 이끌고 참여시키는 건 큰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몇 해 전 유니세프에서 어린이 인권과 관련된 일을 하는 전문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특히 어린이 매매등과 같이 대중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일에 도맡고 있었는데요, 저는 바로 이런 부분에 기능성 게임Serious Game’이 들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이게 과연 어떤 문제인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관여하고 해결할 수는 있는 것인지에 대해 게임을 통해 배우는 거죠. 미국에 우리의 법정Our Courts’이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법률 상식을 늘려주는 게임인데, 특정 상황에서 어린이 스스로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판단하게끔 만드는 게임이죠. 한번은 모든 어린이는 학교를 다닐 수 있어야 할까라는 문제가 있었는데,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어린이들이 모두 당연하다고 답한 반면 저소득층 자녀들은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미국 사회는 이 결과에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죠. 게임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게임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적 변화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보시나요?

제가 접했던 게임 중에 아프리카를 변화시키는 걸 목적으로 한 것이 있어요. 시작은 게임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사람들은 게임 속 자신의 캐릭터가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그와 유사한 행동을 현실에서도 취하게 되는 거죠. 게임과 현실을 어느 정도 섞는 겁니다. 게임을 통해서 현실에서 실천 가능한 동기가 부여되는 과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회적 게임을 하는 게이머들에게 두 가지 목적을 성공적으로 부여하는 것, 즉 게임 안에서 좋은 점수를 얻는 것과 게임 밖에서 당면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하는 것은 실로 어려워 보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맺게끔 하는 게임이 있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애리조나 주에서는 물이 귀하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이슈도 게임으로 만들어졌죠. 이런 사회적 게임들이 이와 같은 복합적인 문제에 대해 명료한 해답을 제시해주기는 어렵습니다. 게임 안에서나 밖에서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화해시키는 건 아직 성사되지 못했듯이, 해결 자체가 꼭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복잡한 이슈에 대해 대중이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 그리고 공론화된 장을 통해 새로운 제안들이 나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게임은 책이나 영화에 비해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게임이 영화와 같은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지만, 영화보다 더 강력한 부분이 있는 미디어라는 것만은 분명하죠. 게임이 다른 미디어에 비해 가장 뛰어난 부분은 개개인을 어떤 문제와 직접적으로 결부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또 다른 예로, UN 세계식량계획을 통해 만들어진 푸드 포스Food Force’라는 게임은 아이티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만들어진 게임입니다. ‘셰일란이란 섬에 사는 주민들이 여러 재해로 고통 받을 때 게이머는 공중 순찰이나 식량 포대 공중 투하와 같은 행동들을 통해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거죠. 그러나 이 과정은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특히 아이들은 이런 게임을 통해 자신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왔던 생활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를 구호하는 방법이 생각보다 복잡한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 등을 배우게 됩니다. 제가 직접 개발에 참여한 게임 중에 하나는 이와 유사하게 빈곤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빈곤을 선택한 이유는 게이머들에게 수치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가난한 가정을 이끌고 있는 엄마라고 가정했을 때, 10이라는 돈을 가지고 이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거죠. 효과는 상당했습니다. 가난이 무엇인지 몰랐던 이들, 특히 아이들에게는 이를 이겨낸다는 것이 게임상에서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었으니까요. 물론, 사회적 게임이 갈 길은 아직 멉니다. 이제까지는 기존의 게임 매커니즘을 그대로 가지고 와 사회적 이슈에 접목한 형태로만 존재했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것입니다. 단순히 어떤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현실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개인이 사회로부터 받을 수 있는 보상은 돈이나 권력 등일 텐데, 게임의 경우는 어떨까요?

사회적 게임의 보상은 현실세계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단순히 점수가 올라가서 특정한 레벨을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그 자체가 게이머에게 보상으로 작용하는 거죠. 미국의 게임 중, 정치인이 되어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체험하는 게임이 있습니다. 늘 좋은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니죠. 정치인이 범죄에 연루되기도 하고, 민감한 사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기도 합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비쳐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 게임을 좋아하지 않지만 게이머들이 관심 있는 건 그게 아닙니다. 오로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하는 문제인 거죠. 그리고 게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그 결과를 통해 게이머들은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됩니다. 이는 학습 또는 교육과도 직결될 수 있습니다. 게임을 이용한다면 점수나 상장등과 같은 보상이 없어도 학생을 공부하게끔 만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게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집중하다 보면 그 자체가 학습의 동기이자 보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보상을 강화하는 방향보다 문제 해결 과정 자체를 즐기게 만드는 거군요.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잔인한 방식으로 아이들의 창조력과 상상력을 죽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걸 우리는 교육이라고 부르며 살고 있죠. 원숭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특정한 행동을 취하라고 훈련시키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보면 됩니다. 아이들의 잠재적인 학습 능력은 그러한 방식으로 발전하지 않습니다. 정답을 가르치기 전에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학습을 체득한 아이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그런 학습 효과를 만끽하며 살게 됩니다. 흔히들 평생교육의 시대가 도래했다고들 하죠? 이건 비단 아이들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는 아닌 겁니다. 21세기가 원하는 인재는 바로 사회적 게임에서 체험할 수 있듯이 자발성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계발하고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며 사회로부터 정해진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이들이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거죠. 빌 게이츠도, 스티브 잡스도 그렇죠. 학교라는 체제, 주어진 절차에 연연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해결해나가는 힘이야말로 사회적 게임을 통해 배양할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이자, 미래가 요구하는 자질인 겁니다. 안정적인 시대에는 학력이나 출신 같은 요소들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불안정한 시대에는 그런 것들이 더 이상 개인을 대변해주지 않습니다. 크리에이티비티와 같은 자질이 훨씬 중요해진 거죠. 최근에 흥미로운 사례가 하나 있었어요. 보통 새로운 전자 기기가 출시되면 수백만 불에 해당하는 대대적인 광고를 하게 마련입니다. 그 전자회사는 전통적으로 텔레비전과 인터넷 등에 엄청난 돈을 들여 광고를 만들었죠. 그런데 같은 제품을 가지고 고작 15살의 소년이 스스로 광고를 만들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어요. 제가 봐도 훨씬 낫다고 할만 했죠. 이런 식으로 이전까지의 룰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크리에이티비티가 훨씬 중요한 시대가 온 겁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 부분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런 면에서 집단 지성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집단 지성의 핵심은 다양성입니다. 구성원이 다양할 때만 큰 힘을 발휘합니다. 한국, 일본 또는 스웨덴이 반대의 예라고 할 수 있겠죠. 한국에서도 과거에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이 굉장히 중요했지 않습니까? 스웨덴에서도 마찬가지였죠. 외국인이 마을에 오면 배척하고, 고립시켰죠. 스웨덴인들끼리 모여 살고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게 최우선이었죠. 그러다 보니 점차 그들은 다양한 정보로부터 멀어지게 된 겁니다. 차단된 벽 안에 갇히게 된 거죠. 집단 지성과 멀어진 결과는 실로 참담했습니다. 경제적, 문화적으로 큰 후퇴를 하는 거죠. 미국도 아직 다양성 때문에 문제를 겪고 있지만 미국 사회가 다양하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흑인 문화가 미국에 끼친 영향력은 엄청납니다. 미국 서부에 철도를 깔 때 중국에서 노동자들이 대대적으로 건너왔습니다. 그 이후로 서부, 특히 캘리포니아에는 중국인들이 엄청나게 늘어났죠. 한때는 그런 중국인들을 쫓아내고자 유혈 사태까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만, 지금까지 그들은 거대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살아가고 있죠. 이게 미국의 모습인 겁니다. 여전히 인종 차별과 같은 문제가 남아있지만 남미인, 아시아인, 인디언 등은 미국 사회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한국은 어떤가요? 세계화의 시대, 불안정한 시대에 이런 다양성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가령, 주변에서 독일인이나 네덜란드인을 쉽게 찾을 수 있나요? 그들이 어떤 정보를 공유하는지 잘 알고 있나요? 이런 것들을 자문해야 할 것입니다.

 

학교에 대해 질문 드리겠습니다. 앞으로의 학교는 어떤 방식의 배움을 실천해야 할까요? 게임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뭘까요?

제가 주장한 것은 게임을 통한 교육이 아닙니다. ‘상황이 내재된 학습Situated Learning’을 강조한 것이죠. 이제껏 우리는 모든 분야를 따로따로 가르쳐왔습니다. 문학, 언어, 수학, 과학, 미술을 독립된 분야로 가르쳐온 것이죠. 그러나 오늘날에는 더 이상 이런 교육이 통하지 않습니다. 통합적인 교육이 필요합니다. 같은 툴을 가지고도 과학적인 증명을 하고 예술적인 표현을 하며 동시에 사회적인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툴로써 게임은 적합한 환경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게임을 통해서 우리는 사회적 개입이 가능하고, 철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며, 그래픽을 통해 감수성을 표현하고, 기술과 알고리즘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걸 통합할 수 있는 게 게임이라는 거죠. 그리고 전 바로 학교가 이러한 게임을 어떻게 다양한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지 더 적극적으로 알리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봅니다. 고질적인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실천적인 방법으로의 게임 교육을 알려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학교는 훨씬 더 흥미진진한 장소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게임을 이용한 시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겠죠. 미국에서도 한국과 비슷하게 고전적인 학습과 시험 제도가 계속되어 왔습니다. 이렇게 배운 것들은 시험을 보고 나서 쉽게 잊히는 지식에 불과하다는 문제가 있죠. 그러나 게임으로 배운 지식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그건 고전적인 학습과 달리 체험적인 상황이 주어졌기 때문이에요. 온몸의 감각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체득한 겁니다. 머리는 그걸 잊어버리더라도 몸은 그걸 기억하는 거죠. 이와 같은 방법들이 고전적인 학습, 평가 제도를 당장 대체할 수 있을 거라고 보진 않지만, 점차적으로 흡수하게 될 것입니다.

 

평가제도가 변하면 창의성을 평가하는 것도 가능할까요?

미국에서도 평가 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교육이 바뀔 수 없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그러기에 굉장히 좋은 시기라는 여론이 형성되어 있어요. 극단적으로 창의력 자체를 시험할 수는 없겠지만, 창의력을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 별로 평가를 진행해 그를 다시 합쳐보면 종합적으로 어떤 학생이 창의적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할 수 있을 겁니다. 게임이 이런 평가 제도에 있어서도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 이제까지 그저 엔터테인먼트라고 치부되어왔던 일면적인 성격을 탈피해 교육뿐 아니라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두자는 거죠. 저의 이런 주장들은 교육계에서도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습니다. 새로운 것,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실리콘밸리를 보세요. 그곳의 수많은 벤처들은 그들 나름의 문화를, 성공 신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그런 예들을 통해 미국 사회는 여러 번의 실패를 통해 성공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죠. 현대사회는 위험을 감수하는 이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은 이들에게 다음 기회를 선사합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 기회를 얻은 사람만이 성공의 문을 통과할 수 있는 거죠.

 

 

 

 

출처:문화계간지 ’1/n’ 3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