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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웹자서전] ep.1 이토록 오지에서, 한 마리 담비처럼
내 고향은 경북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을이다. 첩첩산중 산꼭대기 기막힌 오지, 화전민들의 터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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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 열세 살, 목걸이 공장, 열두 시간의 노동
힘들었던가? 나는 자기연민에 빠질 틈이 없었다. 시장통 공중화장실을 청소하고, 휴지를 팔고 소변 10원, 대변 20원 이용료를 받던 어머니와 여동생이 더 아팠다.
맞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주던 엄마는 그런 일을 했다. 엄마는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어 끼니도 화장실 앞에서 때웠다. 집에서는 시멘트 포대를 털어 봉투를 접어 팔았다. 그런 엄마가 가여웠고 그런 엄마를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안달했다.
ep.12 홍 대리 되기 vs 홍 대리 없는 세상 만들기
홍 대리가 떠나자 폭행이 시작됐다. 작업불량, 복장불량, 청소불량. 고참과 반장들은 온갖 이유를 들어 빳따를 휘둘렀다. 쓰나미처럼 한 차례 매타작이 지나간 다음, 홍 대리가 다시 등장했다. 그는 우아한 자세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공장을 둘러보았다.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폭력을 사주하고 행하는 자였다.
얻어터진 소년공들은 어떤 녀석이 그런 쓸데없는 걸 적어냈는지 서로 의심하며 눈을 부라렸다. 나도 다짐했다. 홍 대리처럼 고졸이 되어 손도 대지 않고 군림하는 사람이 되어보겠다고... 분노와 억울함은 내 안에 그런 지옥도 만들어냈다.
공장에서 맞는다는 얘기를 집엔 한 적이 없다. 나중엔 맞아서 갈비뼈에 금이 간 일도 있었다. 그때는 치료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에 알렸다. 재영이 형은 이렇게 말했다.
“그때까지 나는 재명이가 그렇게 공장에서 맞고 다녔는지 까맣게 몰랐어요. 난 걔보다 먼저 공장에 들어갔지만 나이가 있어서 그렇게 맞지 않았죠. 재명이가 집에는 한 번도 그런 얘기를 안 하니까 전혀 몰랐어요.”
홍 대리가 되겠다는 다짐과 달리, 나는 서서히 직접 때리는 반장이나 고참보다 그걸 용납하고 사주하는 상급자의 위선이 더 나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장과 공장장, 아니 홍 대리라도 마음만 먹으면 폭력은 없어질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들은 폭력으로 유지되는 질서의 최대 수혜자였다.
그들은 겉과 속이 달랐고 말과 행동이 달랐다. 앞에서는 소년공들을 때리지 말라고 했지만, 뒤에서는 더 많이 때리도록 부추겼다. 그들은 우아한 위선자들이었다. 약자에게 더 가혹했고 소년공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 나빴다.
결국 나의 목표는 천천히 수정돼 갔다. 홍 대리 되기가 아니라, ‘홍 대리들’이 없는 세상이어야 했다.
ep.20 어떻게 엇나가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관하여
어떻게 일탈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은 낯설다. 스스로에게 한 번도 그런 질문을 해본 적이 없다. 대답을 하려 들면 생각은 결국 강이 바다로 흘러가듯 엄마에게 맨 먼저 달려간다.
넘치게 사랑해주던 엄마가 있었으니 일탈 같은 선택지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일이 가장 우선이었다.
(중략)
나는 결국 엄마의 손에 가느다란 금가락지를 끼워드렸다. 엄마는 처음에 엉뚱한 데 돈을 썼다고 펄쩍 뛰었지만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재맹아, 내는 이 가락지 끼고 있으먼 세상에 부럽은 것도, 무섭은 것도 없데이.”
엄마는 슬프고 힘든 일이 있으면 손가락의 금가락지를 매만졌다. 그런 엄마를 보면 마음이 짠했다. 그리고 돈이 어떻게 쓰일 때 가장 빛나는지 알 것 같았다.
어떻게 엇나가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모르겠다. 일탈조차도 사치였던 삶이라고 할까...
누구나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잠시 엇나가더라도 멀리 가지는 마시라. 어딘가는 반드시 그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ep.28 투석전만 참여하는 고시생
당장에 운동에, 시위에 뛰어들 수 있는 이영진과 박정추 앞에 부끄러웠다. 동기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변명을 하자면 그때도, 지금도 나는 지극한 실용주의자이며 현실주의자이다. 저 멀리 보이는 대의보다 공장을 다니는 여동생의 아픔이 더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동기들에 대한 부채감을 없애는 방법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었다. 변호사가 되어 약자들과 함께하겠다는 약속.
ep.34 다 잃어도 괜찮다
완성된 초안을 성남 우리집으로 들고 가 2벌식 타자기로 쳤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실무연수 중인 연수생들의 서명을 받기 위해 모두 흩어졌다.
이윽고 1988년 7월 1일, ‘사법부 독립에 관한 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이 발표됐다. 사법연수원생 185명이 서명한 성명서였다. 연수생들이 외부에 집단적으로 견해를 표명한 것은 연수원이 세워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라가 들썩했다.
임명 반대 움직임은 이후 법조계, 종교계, 시민사회단체로 확대됐고 결국 대법관 유임은 없던 일이 되었다.
뿌듯했다. 역사는 그 사건을 ‘2차 사법파동’이라 부른다. 대한민국 역사상 두 번째로 벌어진 법조계의 반독재 투쟁이다.
누군가 연수생 자격을 박탈당하면 어쩌려고 그랬느냐고, 두렵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 몰려오는 두려움과 망설임 앞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 내가 여기까지 온 것도 많이 온 것이다. 지금부터 얻는 것은 덤이니, 다 잃어도 괜찮다.
나를 놓아버리자 두려움이 물러나고 용기가 왔다. 그렇게 길은 다른 방식으로도 열린다.
우리는 승리했다. 또 당시 민주화 바람이 워낙 세게 불었던 탓에 처벌도 면했다. 다행이었다.
ep.36 조영래 변호사의 응원
열아홉 살, 법대에 다니며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할 때 했던 결심과 약속은 더욱 단단해지고 구체화되고 있었다.
사무실을 개업하고 명패 옆에 액자를 하나 놓았다. 액자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민생변론’
생각해보면 당시의 결심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나는 지금도 변호인으로 살고 있을 뿐이다. 내가 변호하는 사람들은 어제의 수많은 '나'이고 매일매일을 성실히 살아가는 이웃들이다. 힘도 약하고 가진 게 없지만 성실하고 순한 사람들...
그런 이들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 것. 그들의 가장 충직하고, 가장 유능한 변호인이 되는 것. 그것이 내 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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