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고통스러우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p.25
총을 메고 곤봉을 쥔 군인 셋이 언덕배기를 타고 내려와 그 젊은 부부를 둘러쌌다. 누군가를 뒤쫓다 잘못 내려온 것 같았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저흰 교회에…
양복 입은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사람의 팔이 어떤 것인지 너는 보았다. 사람의 손, 사람의 허리, 사람의 다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았다. 살려주시오. 헐떡이며 남자가 외쳤다. 경련하던 남자의 발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고 곤봉을 내리쳤다. 곁에서 쉬지 않고 비명을 지르다 머리채를 잡힌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너는 모른다. 덜덜 턱을 떨며 천변 언덕을 기어올라 거리로, 더 낯선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거리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검은 숨 p.57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일곱개의 뺨 /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숨기는가, p.77
학살자 전두환을 타도하라.
뜨거운 면도날로 가슴에 새겨놓은 것 같은 그 문장을 생각하며 그녀는 회벽에 붙은 대통령 사진을 올려다본다.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 무감각을, 잔인성을, 살인을 숨기는가.
일곱개의 뺨 p.85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일곱개의 뺨 /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p.95
신간은 군중을 주제로 한 인문서였다. 저자는 영국 출신이었고 대부분의 사례를 근현대 유럽에서 가져왔다. 프랑스혁명과 스페인 내전, 2차 세계대전. 검열에 걸릴 위험이 있는 68혁명에 관한 장은 번역자가 미리 뺐다. 훗날의 온전한 개정판을 약속하며 그는 서문에 썼다.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다음 문단은 검열 때문에 온전히 책에 실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어서 먹선으로 지워진 넉줄의 문장들을 그녀는 기억했다.
p.126
하루하루의 불면과 악몽, 하루하루의 진통제와 수면유도제 속에서 우리는 더이상 젊지 않았습니다. 더이상 누구도 우리를 위해 염려하거나 눈물 흘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자신조차 우리를 경멸했습니다. 우리들의 몸속에 그 여름의 조사실이 있었습니다. 검정색 모나미 볼펜이 있었습니다. 하얗게 드러난 손가락뼈가 있었습니다. 흐느끼며 애원하고 구걸하는 낯익은 음성이 있었습니다.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p.130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이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살아 있는 김진수와의 만남은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더이상 p.158
대통령이 돌연히 죽은 시월 당신은 자문했다. 이제 폭력의 정점이 사라졌으니, 더이상 그들은 옷을 벗어들고 울부짖는 여공들을 끌고 가지 못하는가? 넘어진 여자애의 배를 밟아 창자를 터뜨리지 못하는가? 박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다는 젊은 소장이 장갑차를 이끌고 서울에 입성하는 것을 곧이어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하는 것을 당신은 신문을 통해 지켜보았다. 조용히 소름이 끼쳤다. 무서운 일이 생길 것 같아.
그애는 그들 같은 의사가 될 수 없다 p.164
오래전 당신에게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여자애를 생각한다. (중략)
그날 오후 회진을 온 말쑥한 얼굴의 의사와 레지던트와 인턴들을 당신은 유심히 올려다봤다. 그애는 그들 같은 의사가 될 수 없다고 그때 생각했다. 동생을 대학 졸업시키면 이십대 중반이 될 것이고, 그때부터 중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한다 해도… 아니, 그애는 그때까지 공장에서 버티지도 못할 것이다. 그애는 자주 코피를 쏟았고 깊은 기침을 했다. 발육이 덜 돼 열무처럼 가는 종아리로 방직기 사이를 뛰어다니다가, 기둥에 기대서서 의식을 잃듯 깜빡 졸았다. 어떻게 이렇게 시끄러워요? 아무 말도 안 들려요. 처음 일을 배우던 날엔 방직기 소음에 놀라, 겁에 질린 듯 동그랗게 뜬 눈으로 당신에게 외쳤다.
p.191
여덟살 묵었을 때 네가 그랬는디. 난 여름은 싫지만 여름밤이 좋아. 암것도 아닌 그 말이 듣기 좋아서 나는 네가 시인이 될라는가, 속으로 생각했는디. 여름밤 마당 평상에서 느이 아부지하고 삼형제하고 같이 수박을 먹을 적에. 입가에 묻은 끈끈하고 다디단 수박물을 네가 혀로 더듬어 핥을 적에.
꽃 핀 쪽으로 p.192
나무 그늘이 햇빛을 가리는 것을 너는 싫어했제. 조그만 것이 힘도 시고 고집도 시어서, 힘껏 내 손목을 밝은 쪽으로 끌었제, 숱이 적고 가늘디가는 머리카락 속까장 땀이 나서 반짝반짝함스로. 아픈 것맨이로 쌕쌕 숨을 몰아쉼스로.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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