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하고 멀게만 느껴지던 많은 철학가, 작가, 작곡가들의 지극히 인간적이고 사소한 습관들을 훔쳐보는 재미가 대단하다.
91
나는 정확한 시간표에 따라 일하는 걸 좋아합니다
벤저민 브리튼 Benjamin Britten
영국 태생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벤저민 브리튼은 영감이 떠오르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진부한 낭만주의적인 작업 방식을 혐오하며, 1967년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나는 정확한 시간표에 따라 일하는 걸 좋아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배우고 시간표에 따라 엄격하게 공부해야 하는 학교에 다녔던 행운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아침 9시에 책상 앞에 앉아 점심시간까지 쉬지 않고 일하는 게 나한테는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닙니다. 오후에는 편지를 쓰거나, 산책을 하면서 다음에 써야할 것에 대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차를 마신 뒤 작업실에 들어가 8시까지 작업에 몰두합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잠이 몰려와서 약간의 독서 이외에는 많은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체로 일찍 잠자리에 듭니다.
브리튼은 아침에 냉수욕을 했고, 저녁에는 더운물로 목욕했다. 여름에는 수영하는 걸 좋아했고, 주말에는 시간이 허락하면 테니스에 열중했다. 집안일에는 젬병이었다. 그의 오랜 동반자이자 협력자였던 피터 피어스는 "벤저민 브리튼은 차를 끓이고 달걀을 삶고 설거지를 그런대로 했지만 꼭 그만큼이었다. 침대를 정리한다고 나서지만 엉망으로 만들어놓기 일쑤였다"라고 회상했다. 브리튼에게는 일이 곧 삶이었다. 때문에 적잖은 동료들과 소원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음악평론가 도널드 미첼은 "작곡가로서의 삶이 그에게는 모든 세계였다. 창작이 최우선적인 고려 사항이었다. ... 그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창작 활동을 위해 희생되어야 했다"라고 브리튼의 삶을 요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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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적 선율을 완벽하게 떠올리기 위한 고통의 시간
프레데리크 쇼팽 Frederic Chopin
프랑스의 소설가 조르주 상드와 관계를 유지하던 10년 동안, 쇼팽은 여름이면 프랑스 중부 노앙에 있는 상드의 시골 영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쇼팽은 전형적인 도시 사람인 까닭에 시골에서는 금세 지루해하며 침울하게 변했다. 그러나 방해하는 것이 없어 음악에 몰두하기에는 더없이 좋았다.
쇼팽은 언제나 느지막이 일어나 침실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낮에는 작곡에 열중하면서 짬을 내어 상드의 딸 솔랑주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오후 6시에는 온 식구가 모여 저녁 식사를 함께했는데, 종종 야외에서 즐기기도 했다.
그 후에는 음악과 대화 등 이런저런 여흥이 뒤따랐다. 그러고 나서 쇼팽은 잠자리에 들었지만 상드는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쇼팽은 노앙에서 어떤 역할도 강요받지 않아 마음 편히 작곡할 수 있었지만, 그의 창작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상드는 쇼팽의 작업 습관을 이렇게 설명했다.
쇼팽의 창작 과정은 즉흥적이고 경이로웠다. 애써 뭔가를 추구하거나 골몰하지도 않고 실마리를 찾아냈다. 그의 피아노에서는 느닷없이 완벽하고 숭고한 선율이 흘러나왔고, 산책하다가 머릿속에 악상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서 콧노래로 흥얼거렸다. 그러나 가장 가슴 저미는 고통의 시간은 그 후에 시작됐다. 조금 전에 들었던 음을 완벽하게 되살리기 위한 분투, 즉 망설임과 조바심이 이어졌다.
쇼팽은 한 덩어리로 인식한 선율을 철저히 분석해서 음표로 써내기를 바랐지만, 그 선율을 명확하게는 다시 찾아낼 수 없다는 안타까움에 그는 절망에 빠져들었다. 그럴 때마다 벼칠이고 방 안에 틀어박혀. 꼼짝하지 않으며 흐느꼈고, 안절부절못하며 서성거렸고, 애꿎은 펜들을 부러뜨렸다. 악보의 소절을 나누는 선을 수없이 그었지만 다시 고쳤고, 몇 번이고 썼다가 지워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세심하고 필사적인 끈기로 다시 시작했다. 쇼팽은 첫 악상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6주가 지난 후에야 한 페이지의 악보를 완성해냈다.
상드는 처음의 영감을 믿으라고 쇼팽을 설득하려 애썼지만, 쇼팽은 상드의 조언을 마뜩잖게 여겼고 작업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으면 화까지 냈다. 그래서 상드는 "내 생각을 고집하지 않았다. 쇼팽은 화가 나면 심상치 않았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는 그의 모습을 보면 금방이라도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라고 말했다.
114
지나친 무계획의 자유
존 애덤스 John Adams
애덤스는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 "내 경험에 따르면, 진정으로 창조적인 사람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고 무척 지루한 작업 습관을 따르는 사람"이라며 "창조력이 필요한 일, 특히 나 같은 사람이 하는 일, 예컨대 교향곡이든 오페라 음악이든 대규모 작품을 쓰는 일은 공평하고 공정하기 때문에 매우 노동집약적이다. 조수의 도움을 받아가며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혼자서 해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애덤스는 언제나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있는 집에 마련한 작업실에서 작업한다. (애덤스에게는 캘리포니아 해변가의 외진 숲에 또 하나의 작업실이 있지만, 단기간 작업할 때만 그곳을 찾는다.) 애덤스는 "집에 있을 때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무척 부산스러운 개를 데리고 집 뒤에 있는 높은 산을 올라간다"라고 말한다. 아침 산행을 마친 후 작업실로 향하고, 9시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오후 4시나 5시까지 계속하며, 잠깐 휴식을 취할 때 아래 층에 내려가 "녹차를 마신다". 이 습관을 제외하면, 애덤스는 창작 과정에서 반드시 지키는 특별한 의식이나 미신이 없다며 "규칙적으로 생활하면 작가가 장애물을 만나거나 끔찍한 위기에 빠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그가 작업실에서 창작에만 집중하며 지낸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선을 깊이 수련한 사람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만큼 순수한 사람도 아니다. 한 시간 정도 작업하고 나면, 이메일이나 그와 유사한 것들을 확인하고 싶은 유혹에 종종 굴복한다. 이런 경우에는 집중력을 유지하는 힘이 고갈되어 정신적인 휴식을 취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누군가와 복잡한 문제로 티격태격하게 되면 그 결과는 뻔하다. 적어도 45분의 시간을 날려버리게 된다.
애덤스는 저녁에는 작업에서 완전히 벗어나려고 애쓴다. 그래서 음악도 많이 듣지 않는다. 낮 시간을 작곡하면서 보낸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해가 저물면 나는 멋진 요리를 준비하고, 책을 읽거나 집사람과 함께 영화를 보려 한다"라고 말한다.
애덤스는 하루하루를 일과표에 따라 규칙적으로 보내지만 음악에 관련한 계획을 무리하게 세우지 않으려고 애쓴다. "엄밀하게 평가하면, 나는 무계획의 자유를 지나칠 정도로 바라는 사람이다. 내년, 심지어 다음 주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싶지 않다. 창조적인 작업에서 비롯되는 충동을 최대한 산뜻하게 유지하려면 철저히 무관심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애덤스도 궁극적으로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 인위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나 애덤스는 "문득 떠오르는 어떤 생각이든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일상의 삶에서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기 위해 애쓴다"라고 말한다.
147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데이비드 린치 david Lynch
데이비드 린치는 1990년 한 기자에게 "나는 질서 정연한 걸 좋아합니다"라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7년 동안 나는 밥스 빅보이 식당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손님들이 몰리는 시간을 피해 2시 30분쯤 그 식당에 가서 초콜릿 셰이크와 넉 잔, 아니 일곱잔의 커피를 마십니다. 설탕을 듬뿍 넣어서요. 초콜릿 셰이크에도 설탕을 듬뿍 넣어서 걸쭉하게 만들어 마십니다. 은잔에 담아서요. 당분을 섭취하면 기분이 황홀해지면서 많은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그럼 냅킨에 바로 기록 해둡니다. 나는 펜을 가져가기만 하면 됩니다. 펜이 없을 때는 웨이트리스에게 빌린 뒤 식당을 떠나면서 잊지 않고 돌려줍니다. 나는 밥스 식당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린치는 1973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한 초월 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을 통해서도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는 2006년에 발표한 책 <데이빗 린치의 빨간 방: 컬트의 제왕이 들려주는 창조와 직관의 비밀>에서 "나는 지난 33년간 단 한번도 명상을 중단한 적이 없다. 아침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매법 20분 정도 명상을 한다. 그러고 나서 하루 일을 시작한다"라고 말했다. 영화를 촬영할 때는 하루 일과를 끝내고 세 번째로 명상하는 경우가 있다며, "우리는 잡다한 일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가. 거기에 명상 하나를 더해서 습관화한다면 명상도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삶의 일부가 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164
1년씩 부부의 역할 바꾸기
카슨 매컬러스 Carson Mecullers
카슨 매컬러스의 첫 소설은 1937년 결혼한 남편 리브스와 맺은 계약 덕분에 쓰였다. 어린 신혼부부 - 당시 카슨은 스물, 리브스는 스물넷 - 는 둘 다 작가가 되기를 동경하여 계약을 맺었다. 한 사람이 글을 쓰는 동안 다른 사람은 취직해서 돈벌이를 하되 1년마다 역할을 바꾸는 것이었다. 당시 카슨은 이미 진행하던 원고가 있었고, 리브스는 노스캐롤라이나의 샬럿에서 일자리를 마련한 터라 카슨이 먼저 문학의 여정을 시작했다.
카슨은 매일 글을 썼는데, 때로는 외풍이 심한 아파트를 빠져나와 지역 도서관에서 보온병에 몰래 가지고 들어간 셰리주를 홀짝거리며 작업했다. 대체로 카슨은 오후 중반까지 작업한 후에 아파트까지 걸아왔다. 아파트에 돌아와서는 요리도 하고 청소도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어린 시절 하녀들의 도움을 받았던 까닭에 그런 일에 익숙지 않았다. (훗날 카슨은 닭을 먼저 씻어야 한다는 걸 모른 채 닭을 구우려 한 적이 있었는데, 리브스가 퇴근해 집에 와서 집 안 가득한 고약한 냄새가 뭐냐고 물었을 때 카슨은 글쓰기에 몰입해 있던 까닭에 그런 냄새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저녁 식사 후, 카슨이 그날 작업한 글을 읽어주면 리브스는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그 후, 그들은 침대에 누워 책을 읽거나 전축을 켜고 음악을 들으며 꿈나라로 향했다.
1년 후, 카슨은 소설 출간 계약을 맺었다. 그 바람에 리브스는 문학을 향한 꿈을 다시 보류하고 돈벌이를 계속했다. 계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리브스는 결혼으로 인해 전업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시험해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카슨의 첫 소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은 1940년에 출간되었고, 곧바로 세상의 주목을 받으면서 카슨은 돈벌이를 위해 글쓰기를 포기할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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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고립 속에서의 작업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Igor Stravinsky
1924년 스트라빈스키는 한 인터뷰에섯 "나는 8시경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쉬지 않고 일한다"라고 말했다. 스트라빈스키가 하루에 작곡에 할애할 수 있는 최대의 시간은 세 시간이었지만, 오후에는 상대적으로 덜 힘든 일, 예컨대 악보를 옮겨 적거나 편지를 쓰고 피아노를 연습하며 보냈다.
순회공연을 하지 않을 때는 영감이 떠오르든 떠오르지 않든 하루도 빠짐없이 작곡에 전념했다. 그는 작곡할 때는 철저하게 혼자이기를 원해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작업실의 창문을 모두 닫았으며 "아무도 들을 수 없다는 걸 확인하지 않으면 작곡을 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작곡이 진전되지 않고 앞뒤가 꽉 막힌 기분이 들면, 잠깐 동안 물구나무서기를 했다. 물구나무를 서면 "머리가 휴식을 취할 수 있어 뇌가 맑아지기" 때문이었다.
184
60개의 커피 빈, 유별난 목욕 습관
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베토벤은 새벽에 일어나 잠깐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고 작업에 돌입했다. 아침 식사는 직접 정성스레 준비한 커피였다. 베토벤의 기준에 따르면, 한 컵에는 60개의 커피 빈이 있어야 했다. 베토벤은 용량은 맞추려고 커피 빈을 하나씩 세기도 했다. 커피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끝내면 곧바로 책상에 앉아 2시나 3시까지 작업하면서, 간혹 휴식을 취하기 위해 집 밖을 잠깐 산책하며 창작력을 북돋웠다. (이런 이유에서 베토벤의 생산성은 따뜻한 계절에 훨씬 더 높았던 게 아닐까 싶다.)
한낮의 식사를 끝낸 후, 베토벤은 본격적인 산책에 나섰고, 남은 오후의 대부분을 산책에 할애했다. 그는 악상이 떠오르면 기록해두려고 항상 펜과 오선지 두 장을 주머니에 넣고 산책에 나섰다. 해가 저물면 선술집에 들러 신문을 읽었다. 저녁 시간은 친구들과 함께 보내거나 극장에서 보냈지만, 겨울에는 집 안에 머물며 독서하는 걸 좋아했다. 저녁 식사도 대체로 간소했다. 한낮의 식사 때 먹고 남은 것과 한 그릇의 수프가 전부였다. 베토벤은 식사를 하며 포도주를 즐겨 마셨고, 저녁 식사 후에는 한 컵의 맥주를 마시며 파이프 담배를 피웠다. 저녁에 작업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무리 늦어도 10시를 넘기지 않았다.
베토벤의 독특한 목욕 습관은 주목할 만하다. 그의 제자이자 비서였던 안톤 신들러(Anton Schindler)는 베토벤의 전기 <내가 알았던 베토벤>에서 스승의 목욕 습관을 이렇게 회상했다.
씻기와 목욕은 베토벤의 삶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런 점에서 베토벤은 진정으로 동양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마호메트가 과장해서 목욕 횟수를 지시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침 작업 시간에 잠깐 산책하려고 옷을 갖춰 입지 않을 때면 거의 벌거벗은 상태로 세면대 앞에 서서, 몇 음계를 오르내리며 고함을 지르거나 때로는 크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동그랗게 모은 손에 물을 부었다. 그 후에는 눈을 굴리거나 뭔가를 응시하며 방에서 돌아다녔고, 뭔가를 끄적거린 후에 물을 붓고 큰 소리로 노래하는 과정을 다시 시작했다. 깊이 명상하는 시간으로, 두 가지 안타까운 결과가 없었다면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을 습관이었다. 하나는 하인들이 때때로 웃음보를 터뜨렸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베토벤은 화를 내며 하인들을 나무라기도 했지만, 그 말투 때문에 더 우스꽝스러운 주인이 되고 말았다. 다른 하나는 너무 많은 물이 자주 바닥을 적시고 아래층까지 흘러내린 까닭에 집주인과 자주 말다툼을 벌여야 했고, 베토벤이 세입자로서 환영받지 못한 주된 이유였다는 것이다. 물이 아래층까지 뚝뚝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 베토벤은 거실 바닥에 아스팔트를 깔아야 할 정도였다. 어쨌든 베토벤은 자신의 발밑이 물로 흥건한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217
세상을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다
프란츠 리스트 Franz Liszt
헝가리의 작곡가이자 피아노의 거장인 프란츠 리스트는 밤에는 잠을 거의 자지 않았고, 매일 교회에 다녔으며, 줄담배를 피우고 술잔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한 제자는 리스트의 일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리스트는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났다. 전날 저녁 친구들과 만나 엄청난 양의 포도주를 마시고 아주 늦게 잠자리에 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뜨면 곧장 일어나 아침 식사도 하지 않고 교회로 달려갔다. 5시에 나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두 개의 롤빵을 먹은 뒤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먼저 편지를 읽고 답장을 했으며, 이런저런 음악을 시도해보고, 그 밖에도 여러 일을 처리했다. 8시가 되면 우체국에 가서, 항상 한 아름의 우편물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피아노를 연습했다.
오후 1시, 점심 식사가 궁중 주방에서 배달되었다. 리스트가 궁중에 초대받지 않은 때에는 리스트의 집으로 점심 식사를 배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가끔 리스트와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음식은 맛있고 알찼지만 간소했다. 식사에는 포도주나, 리스트가 무척 좋아했던 프랑스식으로 물을 섞은 브랜디가 항상 곁들여졌다. 식사를 끝내면 리스트는 담배를 피웠다. 리스트는 식사를 하거나 잠을 잘 때를 제외하면 항상 담배를 입에 물고 살았다. 끝으로는 커피였다. 커피는 매일 신선하게 볶은 것으로, 리스트가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이었다.
오후 늦게 리스트는 두 시간 정도 낮잠을 잤다. 밤에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하거나 작곡했기 때문에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기 위한 잠이었다. 점심 식사에는 음주를 자제했지만 오후와 저녁에는 끊임없이 술잔을 들이켰다. 말년에도 하루에 한두 병의 코냑과 두세 병의 포도주를 마셨고, 때로는 독한 압생트까지 한 잔 들이켰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에 따르면, 리스트는 쾌활한 성품의 소유자였지만 악마적인 면도 있었다. 언젠가 그보다 젊은 피아니스트가 왜 일기를 쓰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리스트는 “세상을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다. 그런 고통을 글로 남겨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일기는 고문실의 기록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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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가정, 이중의 삶
찰스 다윈 Charles Darwin
찰스 다윈은 1942년 런던을 떠나 잉글랜드의 시골로 이주했다. 번잡한 도시 생활을 벗어나 한층 평온한 환경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10여 년 전부터 개인적으로는 확신했지만 아직 공개하지 않은 진화론이란 비밀을 감추려는 목적도 있었다. 인간이 동물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진화론이 빅토리아 시대에 이단적이고 오만한 이론으로 비난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다윈은 개인적인 불명예를 감수하고 싶지 않았고, 더구나 자신의 연구가 무비판적으로 묵살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목가솬으로 있던 켄트의 한적한 마을 다운 하운스에서 때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다윈은 다운 하우스를 “세상의 끝자락”이라 칭했지만, 결국 그곳에서 평생을 보내며 작업에 열중했다.
다운 하우스에 이주한 때부터 1859년 마침내 <종의 기원>을 발표할 때까지 다윈은 이중의 삶을 살았다. 요컨대 진화와 자연선택에 대한 본래의 생각을 비밀리에 간직한 채 과학계의 신임을 얻기 위해 애썼다. 곧 다윈은 따개비에 관련한 네 편의 논문을 발표해 따개비 전문가가 되었고, 1853년에는 그 업적을 인정받아 로열 메달을 받았다. 다윈은 벌과 꽃에 대해서도 연구했고, 산호초와 남아메리카의 지질 구조를 다룬 책도 발표했다. 그 와중에 다윈은 극소수의 믿을 만한 동료들에게 진화론에 대해 은밀하게 알려주었고, 한 동료 과학자에게는 “살인을 자백하는 기분”으로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에, 더 나아가 그 이후로도 다윈읜 건강은 좋지 않았다. 복통과 심계항진, 종기와 두통 등 여러 징후에 시달렸다. 질병의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런던에서 생활하는 동안의 과로가 원인인 듯하며 스트레스로 더욱 악화된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다윈은 다운 하우스에서 수도자처럼 조용한 삶을 살았고, 하루에 몇 시간가량 집중해서 일하며 산책과 낮잠, 독서와 편지 쓰기 등으로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는규칙적인 시간표를 따랐다.
다윈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잠깐 산책하고 혼자 아침 식사를 끝낸 후 아침 8시에 하루의 작업을 시작했다. 복도의 탁자 위에 항상 놓아두던 코담배를 가지러 갈 때를 제외하고 서재에서 90분 정도 집중해서 작업한 후, 다윈은 응접실에 가서 아내 에마를 만났고 그날의 우편물을 받았다. 다윈이 개인적인 편지부터 읽고 나서 소파에 누우면, 에마가 가족의 편지를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편지 읽기가 끝나면, 에마는 소설을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10시 30분, 다윈은 서재로 돌아가 12시나 12시 15분까지 다시 작업했다. 다윈은 이 시간을 하루 작업의 끝이라 생각해서, 종종 “하루의 작업을 무사히 끝냈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 후, 다윈은 반려견 폭스테리어 폴리를 데리고 본격적인 산책에 나섰다. 먼저 온실에 들렀고, 쇠장식을 단 지팡이로 자갈길을 때리며 ‘샌디워크’(다윈이 다운 하우스 남서쪽에 빌린 땅에 나무를 심은 곳-옮긴이)를 몇 번이고 왕복했다. 그 후에 가족들과 함께 하는 점심 식사가 있었다. 다윈은 식사에 곁들여 약간의 포도주를 마시는 걸 좋아했지만 취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다윈의 주장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가 술에 취한 때는 일생에 단 한 번, 그것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다닐 때였다.
점심 식사를 끝내면 응접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었다(비과학적인 글로는 다윈이 유일하게 직접 읽는 신문이었고, 다른 비과학적 글들은 거의 언제나 에마가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그 후에는 벽난로 옆에서, 말 털로 속을 채운 커다란 의자에 앉아 팔걸이에 판자를 걸쳐놓고 편지를 썼다. 써야 할 편지가 많을 경우에는 원고나 교정지 뒷면에 대략 갈겨쓴 후 다른 사람에게 받아쓰게 했다. 다윈은 모든 편지에 답장을 해주는 걸 원칙으로 삼았다. 심지어 짜증나고 멍청한 질문을 해오는 사람들에게도 답장을 해주었다. 하나의 편지에라도 답장을 못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오후 3시까지 편지를 쓴 후에는 위층 침실에 올라가 소파에 누워 담배를 피우며 휴식을 취했고, 그럼 에마가 계속해서 소설을 읽어주었다. 그동안 다윈은 간혹 잠이 들었는데, 그때마다 듣지 못한 부분에 대한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4시에 다윈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그날의 세 번째 산책을 나갔다. 30분 후에는 서재로 돌아가 다시 한 시간가량 일하며, 아침에 작업하면서 미진했던 부분들을 마무리 지었다. 5시 30분에는 응접실에서 30분가량 빈둥거리다가, 위층에 올라가 다시 담배를 물고 휴식을 취하며 에마가 읽어주는 소설을 들었다. 그 후 저녁 식사를 위해 가족들과 함께 어울렸지만, 다윈은 정식으로 식사하지 않고 차를 마시면서 달걀 하나 혹은 작은 고기 한 점에 만족했다. 손님들이 함께하는 경우에도 손님들, 특히 남자 손님들과 대화하며 식탁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30분만 대화해도 다윈은 피로감을 이기지 못했고, 밤잠까지 설쳐서 다음 날의 작업에 지장을 받았다. 대신 다윈은 응접실로 돌아가 여자들과 어울렸는데, 에마와 함께 백개먼(두 사람이 하는 서양식 주사위 놀이로 일종의 전략 게임-옮긴이)을 하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다윈의 아들 프랜시스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아버지는 백개먼으로 활기를 되찾았다. 좋지 않은 수가 나오면 아버지는 한숨을 푹 내쉬었고, 어머니에게 좋은 수가 나오면 거짓으로 과장되게 화를 내기도 했다.”
백개먼을 끝낸 후, 다윈은 과학 서적을 읽었고,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 소파에 누워 에마의 피아노 연주를 들었다. 10시쯤 응접실을 떠나면 30분 내에 잠자리에 들었지만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 그날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골똘히 생각하며 몇 시간을 뜬눈으로 지내기 일쑤였다.
다윈은 이런 식으로 40년을 지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름이면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보냈고, 드물지만 친척들을 잠깐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에서 지내는 걸 가장 편하게 생각했고, 대중 앞에 나서는 것도 극도로 삼갔다. 다윈은 은둔의 삶을 살고 병치레가 잦았지만, 다운 하우스에서 가족들에 둘려싸여 지내며 - 다윈은 에마와의 사이에서 열 자녀를 두었다 - 연구에 몰두하는 삶에 만족했다. 프랜시스 다윈의 기억에 따르면, 찰스 다윈은 평소에는 느릿느릿 힘겹게 움직였지만 실험에 몰입하면 완전히 달라져서 민첩하고 확신에 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종의 절제된 열정으로 찰스 다윈은 언제나 즐겁게 일하는 인상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지, 힘들고 짜증내는 모습을 조금도 보여주지 않았다.”
272
할 일이 너무 많아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1781년 모차르트는 프리랜서 작곡가이자 연주자로서 빈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빈은 모차르트 정도의 재능과 명성을 지닌 음악가에게 많은 기회가 제공된 도시였지만, 그런대로 먹고살려면 피아노 레슨과 음악회 연주를 미친 듯이 해야 했고, 부유한 후원자들과의 모임에도 부지런히 참석해야 했다. 게다가 모차르트는 장래의 아내 콘스탄체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써야 했다. 콘스탄체 어머니의 못마땅해하는 시선과 싸우면서! 이런 이유 때문에 모차르트가 새로운 작품을 위해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서너 시간에 불과했다. 1782년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차르트는 빈의 분주한 나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나열했다.
아침 6시까지는 머리를 깔끔하게 정돈하고, 7시까지는 옷을 완벽하게 입어야 해요. 그리고 9시까지 작곡에 열중하고, 9시부터 오후 1시까지는 레슨을 합니다. 그 후에는 2시나 3시쯤 점심 식사를 하는 귀족의 집에 초대받지 않으면 혼자 점심을 먹어요. 내일하고 모레는 지치 백작 부인과 툰 백작 부인의 집에 점심 초대를 받았습니다. 오후 5시나 6시 전에는 작곡할 틈이 없어요. 그 이후에도 연주회가 잡혀 있을 때가 많아요. 연주회가 없을 때는 9시까지 작곡에 전념하고, 9시가 넘어서야 사랑하는 콘스탄체의 얼굴을 보려고 찾아가지만, 언제나 그녀 어머니의 독설이 그녀를 만났다는 즐거움을 빼앗아갑니다. … 콘스탄체 어머니의 눈총이나, 그 눈총을 견뎌내는 내 역량에 따라 달라지지만 여하튼 10시 반이나 11시를 넘겨서야 집에 돌아와요. 이처럼 저녁에는 연주회 때문에, 또 언제 어디로 불려갈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작곡할 틈이 없어요. 그래서 집에 일찍 돌아올 때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잠깐 짬을 내어 작곡하는 습관을 들였어요. 가끔 1시까지 이렇게 편지를 쓰지만, 내일 6시에는 일어나 있어야 해요.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아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라고 푸념했다. 모차르트가 과장해서 푸념한 것이 아닌듯하다. 수년 후,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빈에 가서, 아들이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사는 걸 확인하고는 “그처럼 분주한 삶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편지를 고향에 보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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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한 삶
구스타프 말러 Gustav Mahler
오늘날에는 말러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활동한 작곡가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지만, 생전에는 지휘자로 더 많이 알려졌다. 실제로 말러의 삶에서 대부분의 경우 작곡은 덤으로 하는 음악 활동이었다. 중기의 완숙한 교향곡들은 빈 궁정 오페라의 음악 감독이란 부담스러운 직책에서 벗어나 여름휴가를 즐기는 동안 작곡한 것들이었다. 말러는 오스트리아 남부 마이어니히의 뵈르터 호숫가에 있는 별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냈다. 말러보다 열아홉이나 어린 부인 알마가 남긴 회고록에 구스타프 말러의 습관이 자헤시 기록돼 있다. 그들은 1901년 11월에 처음 만나 4개월 뒤 결혼했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을 그 별장에서 함께 보냈다. 당시 알마는 그들의 첫아이를 임신 중이었고, 말러는 5번 교향곡을 작곡 중이었다. 말러의 5번 교향곡은 도입부의 장송 행진곡부터, 신부에게 헌정한 가슴이 아리도록 아름다운 4악장까지는 음울한 기운이 지배하는 파격적인 작품이다.
말러의 작품은 격정적이로 혼란스러운 내면의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했지만 마이어니히에서의 생활은 완전히 달랐다. 알마의 표현을 빌리면, 별장에서의 말러는 “무가치한 것을 멀리하고 철저하게 순수함을 추구했다.” 말러는 6시나 6시 30분에 일어나면 곧바로 벨을 눌러 조리사에게 아침 식사를 준비하라고 알렸다. 조리사는 말러가 작곡하기 위해 숲 속에 돌로 지은 오두막으로 금방 갈아 만든 커피, 우유와 다이어트용 빵, 버터와 잼을 가져왔다. (말러는 아침에 작곡을 시작하기 전까지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고 누구의 얼굴도 보려 하지 않았다. 때문에 조리사는 말러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오두말으로 연결된 숲길을 이용하지 않고, 가파르고 미끄러운 오솔길로 가야 했다.) 말러는 오두막에 도착하면 지체 없이 알코올 난로에 불을 지피고 - 알마의 증언에 따르면, “말러는 자주 손가락을 뎄는데, 서툴러서가 아니라 정신을 딴 데 두었기 때문이었다” - 커피에 넣을 우유를 데웠다. 그리고 오두막 밖 벤치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그 후에는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작곡에 열중했다. 말러가 작곡하는 동안, 알마의 역할은 오두막 주변에서 어떤 소리도 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이었다. 알마는 자신도 피아노 치는 걸 자제했을 뿐 아니라, 이웃 사람들에게는 오페라 티켓을 주겠다며 개들을 가둬놓으라고 부탁했다.
말러는 정오까지 작업한 후에 조용히 자기 방으로 돌아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호수로 수영하러 나갔다. 호수 물에 들어가서는 알마에게 호숫가로 나오라는 신호로 휘파람을 불었다. 말러는 몸이 마를 때까지 햇빛 아래 누워 있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몸이 마르면 다시 물로 뛰어들기를 네댓 차례 반복했다. 그렇게 원기를 회복하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가 점심 식사를 시작했다. 점심 식사는 가볍고 소박했지만, 말러의 기호에 철저히 맞추어 조리되고 양념을 최소한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식욕을 자극하지 않고 비만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면서도 포만감을 얻는 식단”으로 알마의 눈에는 “병약한 환자의 식단”처럼 보였다.
점심 식사를 끝내면 말러는 알마를 데리고 호숫가를 서너 시간 산책했다. 산책하는 중에도 멋진 악상이 떠오르면, 걸음을 멈추고 연필로 허공에 박자를 맞춰가며 공책에 악상을 끄적거리기도 했다. 이런 중단이 때로는한 시간 이상 계속되어도, 알마는 남편에게 감히 말을 걸지 못하고 풀밭에 멍하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알마는 “번뜩 떠오른 영감이 마음에 들면 구스타프는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구스타프는 이 세상에서 그 미소보다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라고 회상했지만, 침울하고 고독한 예술가에게 본분을 다하는 아내라는 새로운 상황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말러와 결혼하기 전, 알마도 나름대로 촉망받는 작곡가였으나 말러는 알마에게 가족 중에 작곡가는 한 명으로 충분하다며 작곡을 그만두라고 요구했다.) 1902년 7월에 쓴 일기에서 알마는 ”견디기 힘든 몸부림이 내 안에서 계속된다! 나를 생각해주고 나 자신을 발견하도록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하찮은 가정부로 전락하고 말았다!“라고 한탄했다.
그러나 말러는 아내의 고뇌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거나, 아니면 알았더라도 무시하기로 작심한 듯했다. 가을쯤에 말러는 5번 교향곡을 거의 완성했다. 그 후에도 여름이면 말러는 똑같은 생활 방식을 고수하며 마이어니히에서 6번, 7번, 8번 교향곡을 차례로 작곡했다. 작업이 원만하게 진행되면 말러는 만족감을 감추지 않았는데, 한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삶에서 원하는 것은 작곡하고 싶은 욕망이 전부일세“라고 밝힐 정도였다.
286
좋은 펜, 편안한 의자만 있다면
모턴 펠드먼 Morton Feldman
1971년 펠드먼이 파리에서 북쪽으로 한시시간쯤 떨어진 작은 마을에 한 달 정도 머물며 작업하고 있을 때 프랑스 기자가 찾아왔다 펠드먼은 기자에게 “나는 이곳에서 수도승처럼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11시까지 작곡에 열중 합니다. 그것으로 하루 일과가 끝납니다. 그 후에는 밖에 나가 몇 시간이고 무작정 걷습니다.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1891~1976, 독일 화가)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 미국 작곡가이자 미술가)도 여기에 왔습니다. 다른 활동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뭐가 좋냐고요?
아주 좋습니다. … 하지만 나는 이처럼 여유있고 편안하게 지내는 데 익숙하질 않습니다. 대개는 바쁘게 지내며 이런저런 일을 하는 틈틈이 꾸역꾸역 작업을 해왔습니다. 당신도 잘 알겠지만 나는 과거에 음악 이외에 다른 분야에서도 이랬습니다 일했습니다. 내 부모가 사업을 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분들과 걱정을 함께 나누고 그분들과 같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했지만 집사람이 좋은 직장에 다녀 하루 종일 집 밖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침 6시에 일어나 쇼핑을 하고 식사 준비를 했습니다. 내가 집안 일을 도맡아 미친듯이 일했습니다 저녁이면 어김없이 친구들이 몰려왔습니다. (나도 미처 몰랐지만 친구가 정말 많더군요.) 그렇게 한해를 보내고 나서야 내가 한 줄도 작곡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펠드먼은 1984년의 강연에서, 케이지가 가르쳐준 방법이 “누군가 내게 가르쳐준 가장 중요한 조언”이었다며 “케이지는 나에게 글을 조금 쓴 후에 중단하고 그 글을 베껴 써보라고 했습니다. 글을 옮겨 쓰는 동안, 그 글을 생각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생각들이 떠오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방법대로 작업을 합니다. 창작과 옮겨 쓰기 사이에는 경이로운 관계, 불가사의한 관계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좋은 펜, 편안한 의자 등과 같은 외적인 조건도 중요했다. 펠드먼은 1965년에 발표한 수필에서 이렇게 말했다. “때때로 나는 작업하는 데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데 몰두한다. 그래서 한동안 편안한 의자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모차르트에 필적하는 곡을 써낼 거라고 말했던 것이다.”
295
석양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것도 나의 의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Richard Strauss
슈트라우스의 창작 과정은 체계적이고 규칙적이었다. 그는 작곡하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젖을 제공하는 젖소에 비유했다. 1892년 말, 늑막염과 기관지염을 치료하기 위해 따뜻한 지역으로 가려고 독일을 떠났던 순간까지도 슈트라우스는 규칙적인 시간표를 따랐다. 그는 이집트의 한 호텔에서 집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하루 일과는 무척 단순합니다. 8시에 일어나 목욕을 하고 아침 식사를 합니다. 아침 식사로는 달걀 세 개와 차 그리고 집에서 만든 잼이 전부입니다. 식사 후에는 나일 강변에 자리 잡은 호텔의 야자나무 숲을 30분 정도 산책하고,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작업을 합니다. 1악장 관현악 편성은 더디지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후 1시에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는 쇼펜하우어를 읽거나, 1피아스터(이집트 화폐 단위-옮긴이)를 걸고 콘체 부인과 카드놀이를 합니다. 3시부터 4시까지 다시 작곡을 하고, 4시에 차를 마신 뒤 6시까지 산책을 나갑니다. 이집트의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것도 내 의무의 하나일 테니까요. 6시가 되면 어둑해지고 쌀쌀합니다. 호텔에 돌아와서 7시까지 다시 작업을 하거나 편지를 씁니다. 7시에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담배를 피우며(하루에 8~12개비) 주변 사람들과 담소를 나눕니다. 9시 30분쯤 방에 돌아와 30분쯤 책을 읽고, 10시에 불을 끕니다. 이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301
무용가의 삶은 반복의 연속이다
트와일라 타프 Twyla Tharp
트와일라 타프는 습관에 관한 전문가였다. 2003년에 발표한 <천재들의 창조적 습관>에서 타프는 높은 창조적 수준에 이르기 위해 견실하고 좋은 작업 습관을 몸에 익혀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때문에 그녀의 일상적인 습관이 치열했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나는 매일 아침을 나만의 의식으로 시작한다.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연습복을 입고 레그 워머를 신고 후드티를 걸치고 모자를 쓴다. 그러고는 집 밖으로 나와 택시를 불러 세우고 운전사에게 91번가와 퍼스트 애비뉴 모퉁이에 있는 펌핑 아이언 체육관으로 가자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시간 동안 운동을 한다. 내 의식은 매일 아침 체육관에서 하는 스트레칭과 웨이트트레이닝이 아니다. 내 의식은 바로 택시이다. 운전사에게 목적지를 말하는 순간, 내 의식은 끝난다.
304
작업실은 꿈을 꾸러 가는 공간
스티븐 킹 Stephen King
스티븐 킹은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쓴다. 생일날은 물론이고 휴일에도 예외가 없다. 또 하루 2,000단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는 책상 앞을 떠나지 않는다. 아침 8시나 8시 30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는데 11시 30분이 되기 전에 끝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오후 1시 30분이 되어서야 목표량에 도달한다. 오후와 저녁에는 낮잠을 자거나 편지를 쓰고 책을 읽으면서, 또 가족과 함께 지내거나 텔레비전으로 보스턴 레드삭스의 야구 경기를 보면서 자유롭게 보낸다.
2000년에 발표한 회고록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킹은 픽션의 글쓰기를 ‘창조적인 수면’에 비교하며, 글쓰기 습관을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묘사했다.
침실이 그렇듯 글 쓰는 작업실도 사적인 공간, 즉 당신이 꿈을 꾸러 가는 공간이어야 한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들어가서 2,000단어를 종이나 컴퓨터에 쓴 후에 나오는 시간표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 존재한다. 예컨대 매일 밤 똑같은 시간에 잠자러 가고 그때마다 똑같은 절차를 따름으로써 잠들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과 같다. 글쓰기와 잠자기를 통해, 우리는 똑같은 시간에 일상의 삶을 지배하는 지루하고 합리적인 생각에서 우리의 정신을 해방시킴으로써 육체적으로 평온해지는 방법을 배운다. 정신과 몸이 매일 밤 여섯 시간이든 일곱 시간이든, 혹은 권장 수면 시간인 여덟 시간이든 상당한 시간의 수면에 익숙해지듯, 정신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창조적으로 수면을 취하며 상상한 꿈을 생생하게 전개하도록 훈련시킬 수 있고, 그런 꿈이 픽션으로 성공작 된다.
325
파이프 담배와 블랙커피
프란츠 슈베르트 Franz Schubert
어린 시절의 친구가 남긴 글에 따르면, 프란츠 슈베르트는 “매일 아침 6시에 책상 앞에 앉아 오후 1시까지 쉬지 않고 작곡하곤 했다. 그사이에 파이프 담배는 그의 입에서 떠나질 않았다”. 오후 시간은 여유롭게 보낸 편이었다. 역시 그 친구의 글에 따르면, “슈베르트는 오후에는 전혀 작곡하지 않았다. 점심 식사를 끝내면 커피점으로 달려가 블랙커피를 작은 잔에 마셨고, 한두 시간 정도 담배를 피우며 신문을 읽었다”. 여름날 오후에는 빈 근처의 시골 지역으로 긴 산책을 나갔고, 산책에서 돌아오면 친구들과 어울려 맥주나 포도주를 마셨다.
슈베르트는 돈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에도 피아노 개인 교습을 하지 않고, 주로 친구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그를 도와주던 친구 하나는 “슈베르트는 창의력이 뛰어났고 작곡을 하는 데도 성실했다. 하지만 작곡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라고 기억했다.
(….ㅋㅋㅋ)
328
매일 같은 장소를 왕복한 발걸음
에리크 사티 Erik Satie
1898년 사티는 파리 몽마르트에서 노동자 계급이 사는 아르쾨유 교외로 이주한 후, 그곳에서 평생을 살았다. 하지만 아침이면 약 9킬로미터나 떨어진 파리의 옛 동네까지 걸어오며 자주 들락거리던 카페들을 순례했다. 한 관찰자의 증언에 따르면, 사티는 “우산을 겨드랑이에 꼭 낀 채 발걸음을 작게 내디디며 천천히 걸었다. 걸음을 멈추고 행인들과 얘기를 나눌 때는 무릎을 약간 구부리고,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다른 한손으로는 코안경을 조절했다. 그리고 다시 걸을 때는 의도적으로 발걸음을 작게 내디뎠다”. 사티는 옷차림도 독특했다. 아르쾨유로 이주하던 때, 약간의 유산을 물려받은 사티는 열두 벌의 똑같은 밤색 벨벳 양복을 샀고, 양복 색과 어울리는 중산모도 열두 개나 샀다. 사티가 매일 똑같은 양복을 입고 지나가는 걸 본 동네 사람들은 그를 ‘벨벳 신사’라고 불렀다.
파리에 오면 사티는 친구들의 집을 방문하거나, 카페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사티는 카페에서는 간혹 작곡을 했지만 식당에서는 작곡을 까맣게 잊었다. 사티는 식도락가여서 저녁 식사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다(맛있는 음식을 높이 평가하고 입맛이 까다로웠지만 엄청난 양을 먹기도 했다. 한번은 앉은 자리에서 30개의 달걀 오믈렛을 먹어 치운 적도 있었다). 사티는 기회가 닿으면, 카바레 가수들을 위해 피아노 반주를 해주며 약간의 돈을 벌기도 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카페를 순례하며 많은 술을 마셨다. 파리에서 아르쾨유로 가는 마지막 기차는 새벽 1시에 출발했는데, 사티는 그 기차를 놓치기 일쑤였다. 그럼 다시 9킬로미터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느라, 동트기 직전에야 집에 도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튿날 아침 동이 트면 번개처럼 일어나 다시 파리로 향했다.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미국 학자 로저 섀턱(Roger Shattuck)의 주장에 따르면, 사티의 독특한 박자 감각과 “반복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한 시도는 “매일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끝없이 왕복한 발걸음”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실제로 사티가 파리와 아르쾨유를 오가면서 걸음을 멈추고, 어둑해진 후에는 가로등 아래 서성대며 악상을 기록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가로등이 꺼져 있을 때가 많았고, 그 때문에 사티의 작곡량도 떨어졌다는 소문이 떠돌았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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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서 완벽하게 그린 악보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Dmitry Shostakovich
쇼스타코비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그가 적어도 전통적인 의미에서 작업하는 걸 본 기억이 없을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새로운 작품 전체를 머릿속에서 완전히 개념화한 후에 엄청 빠른 속도로 써내려갔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때는 하루 평균 20~30페이지의 악보를 그려냈고, 거의 수정하지 않았다. 그의 누이동생은 “오빠가 피아노 앞에 앉아 이런저런 시도를 해가며 작곡한 적이 없다는 건 내가 봐도 놀랍기만 했다. 오빠는 그저 피아노 앞에 앉아 머릿속에 들리는 걸 써내려가는 듯했고, 피아노로 완벽하게 연주해냈다”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이런 솜씨를 발휘하기 몇 시간이나 며칠 전부터 쇼스타코비치는 머릿속으로 작곡하고 있었다. 음악평론가 알렉세이 이코니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그렇게 머릿속으로 작곡하는 동안 “그는 내면의 긴장으로 가득한 사람처럼 보였다. 끊임없이 손을 움직이며 잠시도 쉬지 않았다”.
동료 작곡가 미하일 메예로비치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1945년 쇼스타코비치가 휴가를 보낼 때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 메예로비치는 “그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무척 활달한 사람이었다”라고 말했다. 그처럼 부산스러운 사람이 수많은 곡을 작곡했다는 게 미스터리였다.
메예로비치는 쇼스타코비치를 면밀하게 관찰했다.
그는 친구들과 축구를 하며 놀다가 갑자기 사라지곤 했다. 40분쯤 후에 돌아와서는 “뭐하는거야? 공이나 차자고!”라고 말했다. 그 후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함께했고 포도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는 파티에서 가장 눈길을 받는 사람이었지만, 가끔 한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한번은 내가 그곳을 떠나야 할 때쯤에 그가 사라져서 일주일이나 보이지 않았다. 다시 나타났을 때 그는 면도도 하지 않고 무척 피곤해 보였다.
쇼스타코비치가 현악 4중주 2번을 완성할 때였다. 동료 작곡가들은 쇼스타코비치가 새 작품을 자신 있게 창작해내는 속도를 부러워했지만, 정작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이 지나치게 빨리 작곡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 그리고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 자신도 번개 같은 속도로 작곡하는 게 두렵다”라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런 작곡 습관이 좋지 않다는 건 분명하네. 나처럼 빠른 속도로 작곡해서는 안 되겠지. 작곡은 진지한 과정이어야 하고, 발레리나인 친구의 말대로 “그렇게 계속해서 질주할 수는 없겠지”. 나는 악마와 같은 속도로 작곡하고, 일단 작곡을 시작하면 스스로를 주체할 수가 없네. … 피곤하기도 하지만 불편하기도 하네. 그런 하루를 끝마칠 때가 되면 자신감이 사라지니까. 하지만 그런 나쁜 습관을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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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페이지씩 쌓이는 것이 중요하다
조이스 캐럴 오츠 Joyse Carol Oates
조이스 캐럴 오츠는 지금까지 50여 편의 장편소설과 36편의 단편집, 수십여 권의 시집과 수필집 및 희곡을 발표한 다작의 작가로 유명하다. 오츠는 대체로 아침 8시나 8시 30분부터 오후 1시까지 글을 쓴다. 점심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한 후에 오후 4시부터 저녁 식사를 하기 전, 7시까지 다시 작업에 열중한다. 때로는 저녁 식사 후에도 작업하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책을 읽는 데 저녁 시간을 할애한다. 오츠의 지적대로, 그녀가 책상 앞에서 보내는 시간을 고려하면 다작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나는 글을 쓰고 또 쓰고, 틈만 나면 쓴다. 하루 종일 작업해서 겨우 한 페이지를 완성하더라도 그 한 페이지가 중요하다. 그 한 페이지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다작의 작가라는 평판을 얻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나만큼 열심히 일하지도 않고 오랫동안 일하지도 않는 작가들을 기준으로 한 평가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오츠가 항상 재밌고 쉽게 글을 쓴다는 뜻은 아니다. 새로운 소설을 시작할 때마다 처음 몇 주는 무척 힘들고 좌절감까지 맛본다며 “초고 작업은 더러운 바닥에 떨어진 땅콩을 코로 밀어내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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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위한 법칙은 없다
스티브 라이히 steve Reich
스티브 라이히는 최근의 인터뷰에서 “나는 아침형 인간이 아닙니다”라며 “내가 지금까지 작곡한 곡들을 보면, 95퍼센트가 정오에서 자정 사이에 쓴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라이히는 오전 시간에는 운동하고 기도한 후에 아침 식사를 하고, 런던에 있는 유럽 대리인에게 전화를 걸어 공연 스케줄을 상의한다. 정오가 되어야 피아노나 컴퓨터 앞에 자리 잡고 앉으며, 앞으로 열두 시간 동안 가끔 휴식을 취하며 집중해서 일하겠다고 다짐한다. “우 시간가량 일하고 나면 차 한 잔을 마시거나 허드렛일을 하면서 잠깐 동안 쉬어야 합니다. 그 후에 다시 일을 시작합니다. 그런 잠깐의 휴식이 매우 유익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작은 문제에 부딪쳤을 때 상당히 효과가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문제를 잠시 잊고 딴 생각을 하는 겁니다.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그러다 보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자연스레 떠오를 때가 적지 않습니다. 여하튼 문제 해결을 위해 시도해볼 만한 방법이 떠오릅니다. 맞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라이히는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믿지 않지만, 작품이나 악절마다 영감을 받은 정도가 다르다는 말은 인정한다. 또 라이히는 작업을 할 때 작곡가가 순간적으로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대할 수는 있다면서, ”일정한 법칙은 없습니다. 다음 악절이나 작품이 청중을 놀라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정말 경이로운 가능성이지 않습니까!“ 라고말했다.
스티브 라이히 1936~ 미국의 작곡가. 단순한 모티브와 화음의 반복과 조합을 바탕으로 하는 미니멀리즘 양식의 작곡가이다. 대표작으로 네 대의 전자 오르간과 마라카스를 위한 <네 대의 오르간>, 두 사람의 박수로 연주하는 <박수 음악>, 윌리엄C. 윌리엄스의 시에 곡을 붙인 <사막의 음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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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 선수처럼 끊임없이 훈련할 뿐
조지 거슈윈 George Gershwin
아이라 거슈윈은 동신 조지 거슈윈에 대해 “조지는 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 내게는 항상 적잖이 슬퍼 보였다”라고 말했다. 조지 거슈윈이 하루에 평균 열두 시간 이상을 일했다는 건사실이다. 그는 아침 늦게 작업을 시작해 자정 넘어서까지 계속했다. 달걀과 토스트, 커피와 오렌지 주스로 아침 식사를 끝내면 파자마에 목욕 가운을 걸친 채 슬리퍼 차림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곧바로 작곡을 시작했다. 오후 중간쯤 점심 식사를 위해 잠시 쉬었다가, 오후 늦게 산책을 다녀와서는 8시경에 저녁 식사를 했다. 저녁에 파티에 참석하게 되면, 자정 넘어 귀가해서도 새벽까지 작업에 몰두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거슈윈은 영감이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뮤즈의 여신을 기다렸다면 1년에 기껏해야 세 곡 정도 작곡했을 거라고 말했다. 그는 매일 작곡에 매진하는 게 훨씬 낫다면서 “작곡가는 권투 선수처럼 끊임없이 훈련을 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400
악마에게 내준 재능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William Butler Yeats
1912년 예이츠의 동료 시인 에드윈 엘리스(Edwin Ellis)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일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0시부터 11시까지 책을 읽고,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는 글을 씁니다.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다시 3시 30분까지 책을 읽습니다. 그 후에는 5시까지 숲을 산책하거나 호수에서 낚시를 합니다. 그리고 7시까지 편지를 쓰거나 잠깐 작업한 후에 저녁 식사를 위해 외출합니다.” 또 다른 문학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예이츠는 글을 쓰고 싶든 않든 간에 매일 적어도 두 시간을 글쓰기에 할애했다. 이런 엄격한 습관은 두 가지 이유에서 예이츠에게 중요했다. 첫째는 규칙적인 습관에 따르지 않으면 집중력이 흩어지기 때문이었다 - “약간의 변화만 있어도 결코 굳건하지 못한 제 작업 습관이 흔들립니다.” 둘째는 예이츠가 무척 느리게 글을 쓰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예이츠는 1899년의 편지에서 “나는 무척 굼뜬 작가입니다. 하루 대여섯 줄 이상을 쓴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달리 말하면, 80행 이상의 서정시를 짓는 데 3개월 가량의 중노동이 필요했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예이츠는 가욋돈을 벌기 위해 틈틈히 썼던 문학평론과 같은 글을 쓸 때는 그다지 용의주도하지 않았던지 “먹고살기 위해서는 악마에게 자신의 일부를 내주어야 합니다. 내 경우는 평론을 넘겨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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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늘 작곡할 시간이 부족하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Sergei Rachmaninov
1933년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한 기자에게 “나를 피아노의 노예라고 말하는 피아니스트들이 있습니다. 내가 피아노의 노예라면 내 주인은 무척 친절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하루에 두 시간씩 연습하면서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지위를 유지했다. 하지만 작곡은 달랐다. 라흐마니노프는 작곡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듯하다. 1904년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라흐마니노프는 이렇게 한탄했다.
오늘은 아침 9시부터 12시 30분까지 일한 게 전부군. 점심 식사를 한 후에도 작곡에 열중하지 못하고 이렇게 자네에게 편지를 쓰고 있으니 말일세. 앞으로 한 시간의 여유가 있고, 그 후에는 한 시간 정도 산책해야 하네. 산책을 다녀오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고. 따라서 하루에 작곡에 투자하는 시간이 겨우 네 시간 남짓에 불과하네. 너무 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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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작업 습관을 경계한 습관의 동물
버나드 맬러머드 Bernard Malamud
전기 작가 필립 데이비스의 표현에 따르면, 장편과 단편을 가리지 않았던 소설가 버나드 맬러머드는 “시간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맬러머드의 딸은 아버지를 평생 “철저하게 강박적으로 시간을 지키던 분”으로 기억했다. 이 같은 강박적인 시간관념은 작가로 일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더구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평생 교사로 일했기 때문에 시간을 철저히 관리하지 않았다면 글을 쓸 시간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맬러머드는 자제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자제력은 자아를 성취하기 위한 이상적인 수단이다. 예술에서 뭔가를 이루어내고 싶다면 자신부터 단련하라!”고 말했다. (중략)
맬러머드는 습관의 동물이었지만 자신의 작업 습관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걸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1975년의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나일 뿐, 피츠제럴드도 아니고 토머스 울프도 아닙니다. 글을 쓰려면 그냥 앉아서 쓰면 됩니다. 특별한 시간이나 장소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자신의 기질이나 성격에 맞는 방법을 택하면 됩니다. 어떤 작가가 철저히 시간을 지키며 작업한다고, 그 사람이 어떻게 작업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제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 방법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요. 비결이 있다면,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 소설을 쓰는 겁니다. 시간은 훔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리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것을 글로 표현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결국 누구나 자기에게 맞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한마디로, 깨야 할 진짜 미스터리는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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