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열등감이라는 감정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제일 배우고 싶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지 말고, 비위 상하는 그런 감정들을 안은 채로 '이런 감정이 드는 걸 보니, 내가 지금 굉장히 멋진 일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계속 떠올리며 꾸준히 겪어내는 태도.
마음의 위로가 되는, 다시 읽고 싶을 서문 p.5
나는 지금의 당신과 연결되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왔다.
어릴 때는 화가라는 말이 너무 크고 두려웠다. 장래 희망을 적는 칸에는 엉뚱하게 피아니스트를 적곤 했다. 화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을 상상하면 종이를 마주하고 이젤 앞에서 창작과 싸우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그림을 그리는 어른은 어떤 삶을 사는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막연히 부럽고, 두려웠다.
지금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에 대해서 전과는 다르게 생각한다. 농담을 좋아하고, 예민하고, 보이는 것을 좇다가 보이지 않는 것을 따라가 숨어버리고, 종종 우는 사람들. 평범한 나와 당신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심심해서 미칠 것 같을 때 그리는 것이 그림이고, 괜히 외롭다고 느낄 때 글을 쓴다. 바쁘다고는 하지만 자주 지루하고 외로워서, 삶을 잘 모르는 것을 자격으로 앞세워 삶에 대한 글을 썼다. 이 글의 재료는 수많은 고민과 방황, 그리고 옅은 확신이다. 나 같은 미완의 사람도 쓸 이야기가 잔뜩이며, 성공하지 못해도 나름의 소신이 있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상태가 좋은 날이면 기진맥진할 미래의 나를 위로하는 글을 썼다. 하염없이 슬픈 날에는 이만큼 슬픈 적도 있었다며 흔적을 남겼다. 쓰면서 글인지도 몰랐다. 그것은 전부 마음이었다. 언제나 개인적이고 쓰이기 위함이라 실용적이다. 나를 되짚다가 종종 누추한 모습이 떠올라 울기도 했다. 무쓸모처럼 보이는 여러 순간들 속에서 어떤 소용 하나를 믿고 썼다. 나도 당신처럼 살아내고 있다.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조금은 덜 외로웠으면 좋겠다.
2020년 8월 한낮의 중심에서
이연
'감정을 견딜 비위'라는 말을 보자마자 위로가 되었다 p.54
가끔 창작자에게 필요한 것은 대단한 재능과 영감이 아니라 감정을 견딜 비위라는 생각이 든다. 오지 탐험가 베어 그릴스는 징그러운 전갈과 애벌레, 독사를 마주치면 점심을 만났다고 말하며 반갑게 달려간다.
에너지원을 섭취하는 건 멘탈을 다잡는데에 중요하죠. 비록 그 에너지원이 애벌레와 게라고 해도요.
(중략)
위로가 될 만한 비밀을 당신에게 몰래 건넨다.
모든 아티스트가 열등감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잊지 않는 방법은? p.65
나는 요령 없는 모범생이었다. 남들이 시키는 것을 잘 따라 하다보면 뭐라도 될 줄 알았다. 졸업할 즈음엔 시키는 것은 잘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까맣게 잊게 되었다. 이에 책임을 물을 곳이 없었다. 그래서 당부하는 것이다. 항상 기억해야 한다. 배움의 길을 스스로 고찰하고 더듬어가며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싶은 그림을 항상 선명하게 품고, 고독을 참으며 몰래 피워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유창해지면 즐겁다. p.67
잘하게 되는 방법이야 간단하다. 매일 하는 것.
스스로의 어설픔과 창피를 견디며 멋없는 노력을 반복해야 한다. 훌륭한 아티스트들 모두 이 과정을 거쳤다. 당신이 걷고 있는 그 흙길이 모든 예술가가 똑같이 걸어온 길임을 기억하라.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잘 보는 사람이 그만의 창작을 한다. p.82
내가 가장 많이 읽는 글은 단연코 나의 일기다. p.84
나에게는 꼭 솔직해져야 한다. 이게 참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타인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더 많은 거짓말을 한다. 내가 느끼는 온갖 지질한 감정들을 인정해야 글로 적을 수 있다. 눈으로 보기에 역겨운 진실들이 항상 도처에 있었지만 나는 비위를 견디면서 적어냈다. (중략)
마음을 들여다보면 아주 끔찍한 것들이 잔뜩 있어서, 인정하긴 싫지만 스스로가 그렇게 멋진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지금도 누군가가 나를 칭찬하면 주용히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각자의 누추함은 스스로만 아는 것이겠지요.
100년 뒤에도.. p.106
자기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타인에게도 소중한 것을 베풀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이든 그림이든 마찬가지다. 나는 남들에게 본인이 본 좋은 것들을 아낌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진정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무인양품의 디자이너 후카사와 나오토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이 의자는 아름답습니다. 클래식이라고 불릴만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이것은 100년 뒤에도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마치 나를 보는 것처럼 밉고 또 사랑스럽다. p.122
긴 선 p.128
그림을 이미 잘 그리는 사람일지라도 미술학원에 가면 처음에는 누구나 똑같이 선 긋기를 배운다. 여러 가지 중 가장 큰 이유는 그림을 그릴 때 손목이 아니라 어깨를 쓰는 방법과 그 감각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중략)
그렇다면 긴 선을 왜 그어야 하는 걸까? 우리가 긋는 선의 길이는 시선의 길이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시각을 필요에 따라 넓거나 좁게 두어야 형태를 제대로 관찰하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넓게 보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중략)
나는 이것을 삶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삶의 축을 하루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한 달로, 혹은 계절, 아니면 인생에 두는 것이다.
스스로를 이해했다고 오해한 것들 p.171
- 나는 내가 창의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 나의 짧은 손톱이 그저 못생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 나는 개인주의자라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싫다고 생각했다.
- 나는 체육 수행평가 점수를 보며 내가 평생 스포츠를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 나는 내가 32살까지 5평 자취방에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 나는 디자인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 나는 세상에 사랑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 나는 내가 끝없이 우울하다고 생각했다.
- 나는 내가 그림만 그릴 줄 안다고 생각했다.
모범생으로 산다는 것 p.202
태어난 후의 삶은, 특히 성인이 된 이후의 삶은 모든 것이 '선택'에 달려 있다.
모범생으로 산다는 것은 그 권리를 완전히 타인에게 맡기고도 잘 살고 있다고 스스로 세뇌하는 일과 같다.
남 눈치 본 만큼 p.206
당신에게 맞는 도구를 집어 들고 대상을 자유롭게 그리길 바란다. 뭘 그릴지 모르겠으면, 우선 내가 뭘 그리고 싶은지를 먼저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그건 타고난 나의 시선을 인지하는 일과 같다. 나를 오히려 멀리서, 남을 보듯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남 눈치 봐왔던 만큼, 아니 그것의 배로 자신을 살펴라. 그럼 굉장히 흥미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당신은 무척 이상한 사람이라는 사실 말이다.
10년 넘게 썼지만 p.220
예전에 오은 시인의 강연을 들었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가 있다. 머리를 싸매며 창작을 하는 오은 시인에게, 어머니께서 "너는 시를 10년을 넘게 썼으면서도 시 쓰는 게 어렵니?"라고 물었다. 이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어머니, 저는 시를 10년 넘게 썼지만 이 시는 처음 쓰는 시예요."
'읽기 > 밑줄 긋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분 과학 - 이재범 지음 최준석 그림 (0) | 2025.02.08 |
---|---|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 조승리 (0) | 2025.02.02 |
모두가 듣는다 - 루시드폴 (2) | 2024.12.17 |
자기 발견을 향한 피아노 연습 - Seymour Bernstein (1) | 2024.10.30 |
나는 유튜브로 영어를 배웠다 - 김영기(날라리데이브) (1) | 2024.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