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中
시대의 어려움을 방종의 구실로 삼지 말고, 자기 탓으로 돌리지도 말 것. 양자 다 어둡고 진지한 표정으로 흥청거리는 꼴을 볼 때마다 혓바늘이 돋는다.
날카롭게 보지 마라, 그대의 재주는 쉽게 부러져버린다.
나무가 '되기 위해' 씨앗이 자라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된 것들은 또 다른 무엇이 되기 위해, 영원히 무엇이 되지 않기 위해, 끝내는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목적 때문에 생을 망쳐서는 안된다.
사라진 것들에 대한 사랑은 사라질 것들에 대한 사랑을 부른다.
스스로 자신의 시신을 거둘 수 없음 - 그것이 슬픔의 뿌리인지 모른다.
반성하지 않는 사랑은 폭력이다.
상처가 글을 못 쓰게 하는 것은 자기 반성의 여유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이나 증오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냉정할 것!
내가 병에 걸려 아픈 것은 병의 잘못이 아니다.
삶의 근원에 접근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삶으로부터 '성실히' 도피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절망은 허위다. 살아 있으면서, 살아 있음을 부정하는 것.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확신만이 내가 제대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의 지표가 된다.
예술가로서의 삶의 완성의 문제는 나에게 완성된 예술보다 훨씬 중요하게 생각된다. 한 예술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우회적인 대답으로 나는 나 자신에게 언제나 매순간 죽어야 한다고 타이른다. 이때 죽는다는 것은 언젠가 그날, 나는 죽어야 한다는 명확한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을 죽는 그날의 나, 마지막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내가 되어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매순간 죽어야 하고, 그럼으로써 나의 삶, 혹은 현실의 풍경들은 되살아나야 한다. 내가 죽음으로써만 이 세상은 현전하고, 존재하고, 기억된다. 나의 삶은 나의 것이며, 동시에 나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나의 삶을 임의대로 처분하거나 망각할 수 없다. 나의 삶은 매순간 내가 죽기를 바란다. '나는 죽고 싶다'는 말은 '나는 지극히 살고 싶다'는 의미의 온전한 표현이다. 내가 열심히, 철저히 죽고 나서야 나는 소생할 것이다. 이제는 더이상 죽을 수 없을 만큼 내가 죽었을 때 '나사로야, 어서 일어나라!'라는 그 희미하고 따뜻한 음성을 다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아, 어느 날에야 나는 완전히 죽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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