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잔디밭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의 무릎을 베고 있었다. 쌀쌀한 바람이 뺨을 타고 흘렀다. 흥얼거리는 낮은 음성. 나뭇잎들 사이로 햇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흘러간 시간의 냄새가 났다. 바스러지는 낙엽들. 그리고 가을이다. 그리고 햇빛이 손바닥을 뚫고 반짝였다. 그리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그리고 잔디밭이 꺼지면서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찢어진다. 아래로 떨어진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 겪는 건 좀 다르다. 그리고 그리다보면 그림이 완성된다. 가을이다. 갈색으로 물든 잔디밭에서 떨어진다. 누군가의 무릎에서 떨어진다. 찬바람이 뺨을 때린다. 해는 저물고 그리고 눈송이가 떨어진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잠깐 춥다. 그리고 떨어진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다보면 가을이 간다. 잠깐 왔다가 눈이 온다. 아래로 떨어진다. 그리고 찢는다. 날 선 가을이 찢는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그리기 시작한다. 기분좋게 시작한다. 그리고 그리다보면 선명함이 조금씩 사라진다. 그리고 점점 흐려진다. 그리고 점점 슬퍼진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면 그릴 수 없게 된다. 영역을 벗어난다. 다른 것이 되기 전에 대충 수습하곤 하지만 선을 넘으면 그렇게 다른 것이 된다. 당신은 알아챌 수 없다. 그리고 경계는 미묘해서 날 맑을 때는 제법 멀리까지 선명하다. 하지만 고개를 약간만 틀어도 알아볼 수 없다. 그 자리에서 그곳을 봐야 보인다. 언제나 기분좋게 시작하지만 언제나 기분좋게 끝나는 건 아니다. 그리고 당신이 보는 것은 경계를 넘지 않은 그런 것들이다. 다른 것들이 아니다. 당신에 기대 있는. 당신은 내가, 나는 당신이 뭘 보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기대하고 상상하고 그릴 뿐. 내가 상투적인 이유다. 그리고 그리다보면 그림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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