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작은 방.
한동안 잊고 있었던, 마음속의 연약한 부분.
그것은 누구나 갖고 있는 내면의 작은 방이다.
프로가 되면 그 작은 방은 상당히 미묘한 존재가 된다. 어렸을 때부터 품고 있었던 ‘정말로’ 좋아하는 음악의 이미지. 음악에 대한 풋풋한 동경이, 어린아이의 얼굴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음악가가 되면 좋아하는 음악과 훌륭한 음악은 다르다는 업계 내의 상식이 몸에 밴다. 일로 하는 음악, 상품 가치가 있는 음악을 제공하는 데 익숙해질수록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음악이 어떤 것인지 공언하기 어려워진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연주, 스스로 생각하는 이상적인 연주가 얼마나 어렵고 불가능한 것인지 뼈저리게 깨닫는다. 프로 경력이 길어질수록 허들은 계속 높아지고 이상은 멀어져 가슴속의 작은 방은 점점 더 신성한 장소가 된다. 그러다 보면 그 작은 방을 열어보는 일도 극단적으로 줄어들고, 평소에는 그 존재를 일부러 잊게 된다.
279. 감동.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내는 최고 도달점까지 뛰어올라 스파이크를 때리는데 점수가 나지 않는다. 엄청난 신체 능력은 감탄스럽지만 스파이크가 들어오지 않는다. 다시 말해 감동이 없는 것이다.
(중략)
문득 최근의 할리우드 영화는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어트랙션이라고 했던 영화감독의 말이 떠올랐다. 제니퍼 챈의 연주는 어떤지 그런 느낌이었따.
20세기 초부터 두 번의 대전을 거치면서, 혹은 그 전후로, 유럽 클래식 음악계에서 많은 인재들이 미국으로 망명하거나 이주했다. 당연하지만 재능은 부와 권력이 모이는 곳으로 쏠린다. 풍요로운 미국이 거대한 음악 시장으로 바뀌자. 좋든 싫든 음악은 대중화되었다. 사람들은 보다 단순하고 오락적인 음악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것은 가령 정확한 타이밍으로 도입부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나 각각의 음이 살아 있는 명쾌한 초절기교를 보여주는 피아노, 과거에는 특권층 관객들만 들어갈 수 있었떤 살롱과는 달리 보다 많은 관객들을 수용하기 위해 비교도 안 되게 커진 홀에서 구석구석까지 잘 들리는 크고 화려한 음을 내는 것을 의미했다. 당연히 음악가도 시장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런 수요를 채우는 방향으로 연주를 발전시키게 되었다.
관객들은 더 이상 연주가에게 즉흥성을 바라지 않고, 그저 자기가 아는 유명한 곡을 들으러 간다. 난해한 곡이나 신곡에는 관심이 없고 색다른 연주도 꺼린다.
시디의 보금도 그런 경향에 박차를 가했다.
288. 거리.
학창 시절 콩쿠르 경험으로 곡을 외워서 어느 정도 칠 수 있게 되어도 잠시 재워둘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곡과 거리를 두고 깊이 이해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304. 현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곡의 구성이나 당시의 배경을 아는 것은 확실히 중요하단다. 어떤 소리로 연주되고, 어떤 식으로 들릴지 안다는 건 중요한 일이야. 하지만 당시의 울림이 작곡가가 듣고 싶었던 울림이 맞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연 이상적인 소리로 들렸을까, 그건 아무도 몰라.
악기의 음색도 길이 들면 달라지지. 시대가 바뀌면 또 달라진다. 연주하는 사람의 의식도 과거와 똑같을 수는 없어.
음악은 항상 ‘현재’여야만 한다. 박물관에 진열돼 있는 전시품이 아니라, ‘현재’를 함께 ‘살아가는’ 예술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 아름다운 화석을 캐냈다고 거기에 만족해서는 그냥 표본에 그쳐버리기 때문이지.
356. 네가 아니다.
네가 아니다, 나는 가자마 진을 선택했다.
그런 목소리가 들리는것 같아뭐라 말할 수 없는 불쾌한 통증이 가슴을 찔렀다.
숨을 쉴 수 없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처음 맛보는감정이었다. 온몸을 꿰뚫는, 따끔하지만 욱신거리는 아픔. 입안이 썼다.
뭐야, 이건. 신에게 선택받은 자가 눈앞에 있다는 확신이 어째서 내게 이런 고통을 주는거야?
그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아야가 음악으로부터 달아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음악을 한다고, 남들보다 깊이 이해한다고 마음속 어디선가 자만하며 주위를 업신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재능이 없다, 스무 살이 넘으면 일반인, 속으로는 그런 소리를 들을까 봐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에.
366. 잔혹하고, 재미있고, 매력적인
이토록 잔혹하고, 재미있고, 매력적인 이벤트가 또 있을까?
예술에 점수를 매길 수 있는가? 그렇게 묻는다면 누구나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대답하리라. 물론 누구나 머리로는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속으로는 우열이 갈리는 순간을 보고 싶어 한다. 선택받은 자, 승리한 자, 극히 일부에게만 허락된 기프트를 보고 싶다. 거기에 많은 노력이 들수록 환희와 눈물은 보다 감동적이고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도 거기에 이르는 과정을, 사람들의 드라마를 보고 싶은 것이다. 정점을 찍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을 보고 싶은 동시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눈물을 보고 싶은 것이다.
389. 셀프 프로듀스 능력
아마도 이것은 이 아이가 직접 만든 프로그램일 것이다. 그에게는 타고난 편집 능력이 있다. 편집이라는 말에는 다양한 쓰임이 있는데, 최근 음악가들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다. 셀프 프로듀스 능력이라고 해도 좋다. 어떤 음악가가 되고 싶은지, 어떤 음악가로 보이길 원하는지. 그런 객관적 시점을 갖춘 음악가만이 남들과 구별되고 살아남을 수 있다. 리사이틀이든 뭐든 라이브 무대라는 것은 그때마다 한 장의 앨범을 구성하는 작업이다. 그게 남의 곡이든 각기 다른 시대의 곡이든 마찬가지다. 자기 내면으로 끌어들여서 곡을 통해서, 프로그램을 통해서 자신의 세계관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458. 피아니스트 작곡가
아직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지만 마사루에게는 은밀한 야망이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클래식을 만드는 것. 현대에 ‘클래식’으로 불리는 작곡가들처럼 ‘새로운’ 피아니스트 작곡가가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쇼팽, 슈만,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스크랴빈, 버르토크.
그들은 모두 탁월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다. 그렇다면 현대에도 피아니스트 작곡가가 좀 더 나와도 되지 않을까.
물론 그들과 어깨를 견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선인의 곡을 제대로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평생이 모자랄 테고, 주위에서도 연주를 우선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지금도 피아니스트 작곡가는 있지만 클래식계에는 적다. 그나마도 현대음악이라는 범주 안에 있거나 영화음악, 혹은 경음악 장르에 국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클래식 전문 피아니스트가 자작곡을 연주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엄청난 기술을 가진 피아니스트는 많은데 그런 비르투오소안에서 왜 작곡가는 나오지 않는 걸까, 마사루는 늘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소위 말하는 대부분의 ‘현대음악’은 한없이 좁은 시장에서 활동하는 작곡가 본인과 평론가를 위한 음악이지, 반드시 연주하고 싶고 듣고 싶은 곡은 아니다.
그 사이를 연결하는 피아니스트는 없을까?
마사루는 줄곧 그런 고민을 해왔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천재라 불리며 음악의 경계를 뛰어넘었다고 평가받는 프리드리히 굴다마저도 자작곡은 재즈 피아노곡으로 시작했다. 몇 안 되는 빈 정통파 연주자였는데도 다들 기인으로 취급하며 클래식 피아니스트에서 밀려난 존재로 여겼다. 선인들의 영향력은 그토록 강하고, 뛰어넘어야 할 벽은 높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언젠가 내가.
마사루는 그런 꿈을 품고 있었다.
피아노를 위한 곡을 만들고, 악보를 팔고, 다른 피아니스트들도 그걸 연주해준다면.
466. ‘낭만적인’ 소리
인위적으로 울리는 게 아니라 자연히 울리는 소리. 연주하는 게 아니라 흘러나오는 소리. 그런 소리를 찾아서 끝없이 연습했다.
연구 결과 ‘낭만적인’ 소리는 다분히 여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빈약한 소리, 힘겨운 소리로는 안 된다. 갓 말린 보드라운 이불처럼 폭신폭신하면서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어야 한다. 실로 연인들의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처럼 ‘물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물기’를 표현하려면 상당한 여유가 있어야 한다.
군더더기 소리를 내지 않으려면 근력이 필요하다.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면 다리에 힘을 주어야 한다.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으려면 컵을 쥔 손을 허공에서 딱 멈추고 지탱할 힘이 필요하다.
낭만적인 소리를 내려면 강인한 파워가 필요하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것은 곧 ‘어른’이라는 존재가 갖춰야 할 요건이기도 하다.
마사루는 그런 생각을 했다.
더 강해져야 해.
강인한 육체, 강인한 정신. 그것이 진정 ‘낭만적인’ 소리를 자아내리라.
662. 현대음악.
라흐마니노프 2번은 초연 때무터 열광적인 지지르 받았다고 한다.
요즘처럼 유행가가 없던 시대였다. 아니, 이제나 ‘클래식’이라고 불리지, 당시에는 최첨단을 달리는 최신 ‘팝스’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라이브로만 음악을 들었던 시대. 이 곡을 처음 들은 사람들, 그리고 그 평판을 듣고 자기도 듣고 싶어 콘서트 티켓을 손에 넣은 사람들은 살아 있는 연주를 듣고 얼마나 감동하고 흥분했을까?
(중략)
마사루는 이른바 ‘현대음악’도 싫지 않았다. 대부분 무조에 박자를 세기 어렵고, 연주하는 쪽도 듣는 쪽도 인내심을 강요당하고, 제대로 된 멜로디가 있으면 오히려 경멸당하는, 음악적 가치가 뒤바뀌어버린 곡이라도 들으면 나름대로 재미있다.
하지만 좁은 길에 갇힌 그럼 음악이 멜로디가 풍부하고 누가 들어도 감동할 수 있는 음악을 얕잡아 보는 건 잘못된 일이고, 자기들의 대중적이지 못한 취향을 자란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짓이다.
674. 갇혀 있는
옛날에는 자연 속에서 음악을 듣고 기록해왔는데, 지금은 아무도 자연 속에서 음악을 듣지 않고 자기 귓속에 가두어두지. 다들 그게 음악이라고 생각해.
(중략)
그래, 난 지금까지 줄곧 음악으로부터 받기만 했어. 우리는 모두 음악으로부터 받을 생각만 했지, 돌려주지 않았어. 착취만 했지 보답은 하지 않았어. 슬슬 돌려줘도 좋을 때야.
회사 도서관에서 온다 리쿠라는 이름을 보고 반가워서 집어들었다가, 이야기의 매력에 곧바로 빠져들어서 정신없이 읽었다. 음악을 좋아하거나 생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재미있게 볼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이야기. 다시 피아노 레슨을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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