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여러 번 고쳐 쓰는 습관은 그때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나는 그런 작업을 상대가 가진 구슬의 색깔과 배치를 정확히 맞추기 위해 여러 조합을 시도해야 하는 <마스터마인드> 보드게임처럼 생각하며 한다.
한 가지 플롯을 테스트해 봤는데 뭔가 맞지 않고 삐걱거리는 게 발견되면 전혀 다른 플롯을 테스트해 보는 식이다. 그렇게 테스트를 거듭하며 여러 버전을 시험하다 보면 결국 마음에 드는 이야기가 나오게 마련이다.
독서량도 이전보다 엄청나게 늘렸다. 그때부터는 단순히 읽기 위한 독서가 아니라 쓰기 위한 독서, 다시 말해 기술적인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장면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특정한 감정을 유발하는지 분석하면서 책을 읽었다.
나는 방대한 독서를 통해 글쓰기에 필요한 두 가지 상호보완적 기술의 중요성을 다시금 확인했다. 우스갯소리의 메커니즘과 마술의 메커니즘.
독자의 흥미를 끌기 위해선 이렇게 해야 한다.
1) 독자에게 이야기의 대략적인 밑그림을 보여 준다.
2) 중요한 뭔가를 계속 숨긴 채 서사를 전개해 나간다.
3) 독자가 흥미를 잃지 않게 자잘한 요소를 조금씩 드러내 보여 준다.
4) 마지막에 가서한 방에 해답을 제시함으로써 놀라움을 선사한다.
5) 놀라움 속에 마술이 끝나는 것으로 등장인물들의 여정이 마무리되면, 이야기 전체의 극적 효과를 높이는 동시에 피날레를 장식할 마지막 터치를 추가한다. 일명 <체리 장식 효과>
- 112p.
필립 K. 딕 - 높은 성의 사내. 유크로니아 개념에 기반해 쓰인 이야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패망해 미국과 소련이 그랬던 것처럼 만약 나치 독일과 일본이 세계의 패권을 나눠 가졌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그리고 있다.
- 125p.
스물일곱 살, 쥐의 위계질서
아는 과학자들에게 흥미로운 연구를 하는 동료가 있으면 알려 달라고 했더니, 한 사람이 로렌 대학교 낭시 캠퍼스에 있는 행동 생물학 연구소의 디디에 드조르 교수를 언급했다.
그는 수영 능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쥐 여섯 마리를 케이지 하나에 가두고 실험했다. 케이지 끝에 난 문을 열고 나가면 쥐들은 곧바로 수영장 물로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먹이가 담긴 통은 건너편에 놓여 있어, 배고픈 쥐들이 먹이를 먹으려면 수영장을 헤엄쳐 건널 수밖에 없었다.
실험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흥미로운 사실이 관찰되었다. 쥐들이 먹이를 찾아 한꺼번에 물로 뛰어들어 숨을 참고 헤엄치는 대신, 자기들끼리 역할을 분배한 듯한 행동을 보인 것이다.
제일 먼저 수영장을 헤엄쳐 건너가 먹이를 물고 돌아오는 쥐가 관찰되었다. 그런데 그 쥐가 케이지에 도착하는 순간 문 앞에서 기다리던 쥐들이 달려들어 그 쥐의 머리를 물속에 처박고 사료를 빼앗아 먹었다. 노동의 대가를 도둑질당한 그 쥐를 드조르 교수는 <피착취형 쥐>라고 불렀다.
그 쥐가 물고 온 먹이를 빼앗아 먹은 쥐들에게는 <착취형 쥐>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상황을 면밀히 분석해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아낸 쥐가 하나 있었다. 그 쥐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건너편까지 헤엄쳐 간 다음 먹이를 물고 돌아와서는, 문 앞에서 기다리던 쥐들을 밀치고 혼자 케이지에 들어가 구석에서 조용히 먹이를 먹었다. 드조르교수는 그 쥐를 <단독 행동형 쥐>로 분류했다.
마지막으로, 헤엄쳐 사료를 물고 오지는 못하고 남들이 남기는 부스러기만 먹는 쥐가 발견되었다. 착취형 쥐는 물론이고 피착취형쥐도 수시로 그 쥐에게 짜증 섞인 발길질을 했다. 드조르 교수는 그 쥐에게 <잉여형 쥐>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한 케이지 안에 든 쥐 여섯 마리 사이에서 다음과 같이 역할 분배가 일어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 착취형 두 마리
- 피착취형 두 마리
- 단독 행동형 한 마리
- 잉여형 한 마리
드로즈 교수는 케이지 수를 늘려 같은 실험을 진행한 결과 쥐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역할을 분배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쥐들의 위계질서를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 그는 착취형 쥐 여섯 마리를 한 케이지에 넣어 관찰하기로 했다. 그 여섯 마리는 케이지 안에서 밤새 혈투를 벌였다. 다음 날 아침, 그들 사이에서 다시 똑같은 방식으로 역할이 나뉜 것이 확인되었다. 착취형 두 마리, 피착취형 두 마리, 단독 행동형 한 마리, 잉여형 한 마리.
드조르 교수는 피착취형 여섯 마리, 단독 행동형 여섯 마리, 잉여형 여섯 마리를 각각 한 케이지에 넣고 진행한 실험에서도 똑같은 결과를 얻었다. 쥐들 사이에서는 구성원의 종류에 상관없이 항상 같은 방식으로 역할 분배가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드조르 교수는 이를 쥐라는 종의 <사회 구성 양식>으로 이해했다.
그는 똑같은 실험을 규모를 늘려 다시 해보기로 했다. 쥐 3백 마리를 커다란 케이지에 넣고 관찰했더니 역시나 밤새 소동이 벌어졌다. 아침이 되자 죽은 잉여형 쥐 몇 마리가 가죽이 벗겨진 채 발견되었다. 또 하나 목격된 흥미로운 사실은 행동파 부하들을 거느린 최고 우두머리들의 출현이었다. 그 쥐들은 굳이 행동에 나설 필요 없이 지배자로 군림했다.
드조르 교수는 케이지 속 개체 수가 늘어날수록 가해 행위가 빈번해지고 초착취형, 초피착취형, 초잉여형의 등장으로 쥐 사회가 한층 세분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복잡해진 사회 체계를 통해 관리하는 집단이 출현해 지배층을 떠받들고 최하층을 짓밟는다는 것도 확인했다.
관리 집단은 잉여형 쥐들에게 본보기 삼아 가혹한 형벌을 내림으로써 반역을 원천 차단했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쥐들에게 미리 공포감을 불어넣는 방식을 쓴 것이다.
단독 행동형 쥐들은 자기들끼리 한쪽 구석에 모여 다른 쥐들이 접근해 오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다른 쥐들을 의심하고 점점 그들과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드조르 교수는 개체 수가 많아질수록 쥐들 간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잉여형 쥐들에 대한 억압 또한 강화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보통 쥐보다 지능이 높아 서커스 공연에 주로 사용되는 시궁쥐에게서는 조금 다른 양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그는 내게 설명했다.
그들 사이에서도 똑같은 역할 분배가 관찰되긴 하지만, 시궁쥐가 폭력을 줄이기 위한 나름의 방법을 고안해 냈다는 것이다. 피착취형 쥐들은 착취형 쥐들에게 바칠 먹이를 늘 따로 떼어 준비해 놓음으로써 그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면서 자신들도 편하게 먹이를 먹을 수 있었다. <지배를 위해 굴종을 택한다>는 ‘듄’의 법칙이 시궁쥐들에게서 확인된 것이다.
그런 피착취형 쥐들의 전략은 또 다른 결과로 나타났다. 단독 행동형 쥐는 많아진 반면 잉여형 쥐는 줄어든 것이다. 착취형 쥐의 폭력성이 전보다 현저하게 감소한것도 확인되었다.
쥐들의 위계질서를 알고 나서 단독 행동형 인간을 목표로 정했다. 그것이 내가 가장 오래 버틸 방법이자 <다른 사람이 네 형복을 좌지우지하는 순간 너는 불행해져>라던 렌의 조언에 부합하는 방식이었다.
드조르 교수는 마지막으로 실험 대상 쥐들의 뇌를 분석한 결과를 들려줬다. 뜻밖에도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 쥐는 착취형 쥐라고 했다. 피착취형 쥐들이 반란을 일으켜 특권적 지위를 잃게 될까 노심초사하는 탓이다.
(…중략)
당시 나는 <단독 행동형 인간>을 꿈꿨지만 실제로는 <피착취형 인간>에 가까웠다. 하지만 내 사무실도 있고 편집부 회의에 참석해 대중은 모르는 뉴스에 접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으며 낙관주의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처럼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해당 분야 전문가에게 직접 최신 연구 성과에 관해 들을 수 있다는건 솔직히 대단한 특권 아닌가.
게다가 수시로 취재 여행도 다닐 수 있지 않은가.
그 정도면 의미 있는 삶이라고 스스로 주문을 걸었던 것 같다. 그래서 불평도 하지 않았고 피착취자인 처지가 견딜만하다고 여겼다.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와 월세를 낼 수 있는 게 어디야.
내 목에 걸린 <’누벨 옵스‘ 과학 전문 기자>라는 근사한 목걸이가 자랑스러웠다. 그게 악마가 매어 놓은 목줄이란 걸 모르고 말이다. 목줄을 풀어 버리고 마침내 단독 행동형 인간이 되기위해선 극적인 전환점이 필요했다.
그 순간이 곧 도래하리란 것을 당시에는 몰랐다.
-179p.
놀랍게도 나는 여러모로 나와 정반대인 러시아 병사 이고르에게 가장 마음이 갔다. <선제 타격 아니면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나쁜 패를 쥐고도 포커에서 이기는 게 진짜 실력이다>라는 삶의 철학을 지녔다.
-321p.
자신이 끔찍이 싫어했던 음악가 형제와 사촌들을 뛰어넘으려는 욕심이 없었다면 바흐가 토카타를 작곡할 수 있었을까?
-371p.
카산드라의 거울 집필 이야기
그렇게 해서 써낸 이야기는 매우 인상적인 첫 장면으로 시작한다. 한 남자가 몽파르나스 타워에서 추락한다. 그는 5초 후 사망 확률을 예언하는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있다. 그가 떨어지는 동안 시계의 숫자는 점점 커진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숫자가 다시 작아지기 시작한다. 도로에 트럭이 한 대 나타나 추락의 충격을 흡수해 준 것이다. 이렇게 시간의 흐름을 빠르게 했다 느리게 했다 하는 장면을 쓸 때면 흥분을 넘어 쾌락을 느낀다. 글쓰기는 템포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이다. 마치 작곡하듯이 말이다.
40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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