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적합한 음악을 찾을 때 작곡가에게 얼마나 많이 의존하시나요?
저는 영화를 찍을 때 작곡가를 굳게 믿고 작곡가의 생각을 존중합니다. 촬영한 영상을 편집할 때 기존의 음악 중에 제 생각을 대변할 만한 곡들을 골라 영상에 깔아놓기는 합니다. 임시 음악이죠. 작곡가들에게 임시 음악은 애증의 대상입니다. 아마 앞으로 인터뷰하시면서 비슷한 말을 많이 들으실 겁니다. 임시 음악은 감독이 원하는 음악의 방향을 간단히 알려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작곡가의 생각을 가두기 때문입니다.
작곡가는 본인 스스로 최선의 결과물을 낼 때까지 감독이 열린 마음으로 기다려주길 바랄 겁니다. 하지만 너무 맡겨만 두면 감독의 뜻과 전혀 다른 음악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다소 민감한 문제죠.
그래서 저는 임시 음악을 들려줄 뿐 아니라 영화 제작의 초기 단계부터 작곡가와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대화의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화의 주제는 무엇인가? 감독이 관객에게 전하려는 주제 의식과 정서는 무엇인가? 전달이 잘되게 하려면 어떤 촉진제가 필요할까? 주제의 통일성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사뿐 아니라 음악으로도 장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을까? 음악으로 특정한 감정을 환기할 수 있을까?
작곡가가 만든 음악이 임시 음악을 매번 능가하는 건 감독과 작곡가의 소통 덕분입니다. 임시 음악으로 쓸 곡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 많은 음악을 당해낼 작곡가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영화에 나온 곡들을 아무렇게나 모아 영상에 깔면 주제나 음향의 통일성을 절대 유지할 수 없습니다. 작곡가가 늘 이기는 건 이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한 영화를 작곡가에게 맡길 때 불안하시지는 않나요?
작곡하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작곡가 혼자 곡을 만들어야 할 때, 감독은 작곡가에게 반드시 충분한 시간을 줘야 합니다. 편집된 영상을 보고 검토하고 자신의 음악적 아이디어를 설명하거나 때에 따라서는 해당 영화에 적합한 작곡가인지 테스트를 받을 시간을 줘야 해요. 그래서 저는 작곡가와 최대한 빨리 만나 작업을 시작합니다.
특히 제임스 호너는 영화를 편집하기 훨씬 전부터 테마곡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런저런 멜로디를 쳐보고 소리를 내보면서 적합한 음악적 어휘를 고른다고 할까요.
감독은 처리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촬영을 끝내고 후반 작업이 시작되면 할 일이 더 늘어납니다. 특수 효과도 넣고 편집도 하고 영화를 마무리하는 데 필요한 온갖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합니다. 그렇더라도 영화음악을 위한 시간은 내야 합니다. 너무나 중요하거든요.
음악은 영화의 정서를 전달합니다. 감정을 끌어내는 촉진제 역할을 하죠. 장면에 맞는 긴장감이나 미감, 비애감 등의 감정을 일으킵니다.
음악은 영화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예요. 다른 부분에 아무리 많은 공을 들여도 음악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훌륭한 영화음악은 휘파람으로 불 수 있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는데요.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있어 멜로디가 유독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멜로디가 감정을 촉발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멜로디가 영화에 나온 무언가를 연상시키기 시작하면 관객은 그 멜로디가 낭로 때마다 장면에 더 깊이 몰입하게 됩니다. 멜로디가 장면과 대조를 이루며 극적인 효과를 낼 수도 있고요.
멜로디는 등장인물과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등장인물이 죽은 뒤에 그 인물과 연관된 멜로디가 나오면 관객은 자기도 모르게 강력한 감정에 휩싸입니다. 본능적인 감정이죠.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 한구석에서 감정이 일어나는 겁니다.
제임스 호너가 스파팅을 잘했다고 하던데, 우선 스파팅 세션이 무엇인가요? 그리고 영화 제작에서 스파팅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요? (스파팅 세션 : 촬영과 편집이 끝난 영상을 감독과 작곡가, 관계자들이 보면서 어느 장면에 어떤 곡을 넣을지 의논해 정하는 단계)
저는 보통 스파팅 세션에 작곡가와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음악을 꺼놓고 해당 장면을 설명하기도 하고, 아이팟으로 임시 음악을 틀어 제가 어떤 스타일의 음악을 원하는지 들려주기도 합니다.
백 마디 말로 서툴게 표현하는 것보다는 직접 들려주는 게 낫습니다. 이때 작곡가는 감독의 음악적 아이디어에 휘둘리지 않고 그 아이디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작곡가와 직접 음악 제작의 기본 원칙을 정합니다. 처음 만나자마자 어떤 장면에 어떤 음악을 넣을지 정하는 스파팅을 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제임스 호너와 일할 때는 우선 영화부터 보게 합니다. 편집본이 없으면 하루 단위로 촬영된 '데일리 영상'이라도 보여줍니다.
<타이타닉>때는 35시간에 달하는 촬영 영상을 몰입해서 보게 했습니다. 영화의 시각적 특성과 시간과 공간, 등장인물들에 대한 감을 잡게 했죠. 멜로디가 있는 테마곡도 주문했습니다. 각각의 장면에 맞는 음악은 나중에 생각하고 테마곡부터 만들라고 했어요. <타이타닉>의 주제를 온전히 표현할 음악부터 고민하라고 했죠. 테마곡만 제대로 만들면 나머지는 저절로 될 거라고요. 제임스는 제 주문을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편집하기 전의 촬영분을 보면서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를 확실히 파악했어요. 그런 다음 제가 편집을 한창 하는 동안 곡을 써서는 제 앞에서 직접 <타이타닉>의 테마곡 세 곡을 피아노 독주로 들려줬습니다. 세 곡 모두 눈물이 날 만큼 감동적이었어요. 첫 번째 곡을 듣자마자 '아, 정말 멋진 영화가 되겠구나.'라는 확신이 들었죠. 두 번째 곡을 듣고 나서는 "두 곡이나 썼어요?"라고 물었어요. 그러자 제임스가 그러더군요. "아, 한 곡 더 있어요." 세 곡 다 제 마음속 깊은 곳을 울렸습니다. 독주라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제임스는 관현악단을 대동하는 대신 피아노 독주를 택했어요. 멜로디의 힘을 절감한 순간이었습니다. 특히 한 곡은 단조여서 그런지 애타는 마음과 상실감이 더 진하게 느껴졌습니다. 정말 훌륭했습니다. 각각의 곡을 영화에 맞추는 과정에서 온갖 시행착오를 겪을 게 분명했지만, 그 순간 확신했습니다. 이미 이긴 싸움이라는 걸요. 스파팅은 아직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아무튼 첫 번째 단계는 그렇게 진행됩니다. 그러다 편집이 끝나면 드디어 작곡가와 함께 영상을 보면서 각각의 장면에 맞는 음악을 정하는 스파팅 작업을 하죠. <타이타닉>때는 제가 임시 음악으로 엔야의 곡을 하도 많이 틀었더니 엔야라면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하더군요.(웃음) 왜 임시 음악이 작곡가에게 애증의 대상인지 아시겠죠? 그래도 저는 계속 제임스에게 대놓고 요구했습니다. "자, 잘 들어봐요. 이런 식으로 바이올린 소리는 하나도 안 들어가게 해줘요. 피아노와 보컬 소리만 들리게요."
제임스가 웅장하고 화려한 바이올린 연주가 잔뜩 들어간 고전적인 곡을 써올까 봐 걱정됐습니다. 영화음악 작곡가들이 클래식 음악 하면 그런 음악을 기본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거든요. 제임스도 인정하더군요. 자기도 그때까지 시대극이나 대하극류의 영화를 맡으면 그런 음악을 썼다고요.
그래서 새로운 스타일에 도전해보라고 했습니다. 요란한 현악기 연주가 들어가지 않는 곡을 한번 써보라고요. 현악이 은은하게 깔리는 정도는 괜찮았지만 주 멜로디를 연주할 때는 현악기를 쓰지 않길 바랐습니다. 좀 색다른 음악을 원했죠.
그랬더니 타이타닉 호가 아일랜드에서 건조되고 잉글랜드에서 출항한 배라는 점을 고려해, 켈트 풍의 음악을 만들어 왔더군요. 풍부하면서도 달콤 쌉쌀한 곡이었어요. 백파이프 소리도 그렇고 감정을 깊이 자극하는 곡이었죠. 나중에는 가사를 붙이고 가수를 섭외하긴 했지만 처음에는 가사가 없었어요.
무턱대고 한 제 부탁을 제임스가 현명하게 해석해주지 않았다면 <타이타닉>의 독특하고 강렬한 음악은 탄생하지 못했을 겁니다.
감독과 작곡가에게 스파팅 세션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스파팅 세션의 목표는 작곡가와 미루고 미뤘던 대화를 드디어 나누는 겁니다.(웃음) 농담이고 스파팅 세션은 감독과 작곡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는 시간이에요.
이 시간에 감독은 작곡가에게 배턴을 넘깁니다. "자, 내가 할 일은 다 했습니다. 캐스팅하고 멋지게 촬영하고 완벽하게 편집했어요. 이제 당신 차례예요." 보통 작곡가는 편집이 다 끝난 시점, 그러니까 꽤 후반부에 등장해요.
감독은 이 시간에 자신이 어떤 음악을 원하는지 작곡가에게 최대한 잘 전달하려 애씁니다.
작곡가도 백지 상태로 스파팅에 임하지 않습니다. 대본은 이미 읽었을테고 하루 단위로 찍은 촬영분이나 편집본을 미리 보고 오기도 합니다. 스파팅 세션은 작곡가가 음악으로 강조해야 할 장면과 내버려 둬야 할 장면이 어딘지, 본인의 생각을 감독에게 설명할 기회입니다.
음악을 부각하지 말아야 할 때 작곡가는 "이 장면은 음악을 깔면 오히려 해가 될 테니 넣지 않겠습니다.", 혹은 "이 장면에는 음악으로 장면을 살렸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아주 은은한 음악을 까는 게 좋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럴 때는 특히 감독과 작곡가의 대화와 소통이 중요합니다.
감독들은 대부분 장면의 느낌을 시각적으로 표현합니다. 눈에 보이는 배우의 연기로 감정을 표현하죠. 하지만 그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법은 모릅니다. 본인이 원하는 음악을 작곡가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감독도 많습니다.
따라서 작곡가는 감독이 마구 늘어놓는 이야기를 심리 치료사처럼 해석해 핵심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파악한 감독의 뜻을 전에 없던 신선한 음악으로 구현해야 하죠. 진부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감독의 비전을 지지하고 강화하는 음악으로 말이죠.
제임스 호너가 <타이타닉>처럼 야심 찬 영화에 걸맞은 작곡가라는 확신이 든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임스는 신인 때부터 야심만만했어요.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로저 코먼의 영화 <우주의 7인>의 음악 작업을 막 끝낸 참이었어요. 로저 코먼의 사다으로 저도 그 영화에 참여했거든요.
몇 년 뒤 <에어리언2>를 찍게 됐는데 제작자인 게일 허드가 음악 감독으로 제임스를 추천하더군요. 이미 제임스가 작곡가로 자리를 잡았을 때였어요. 게일은 <심해의 공포>를 제작할 때 제임스와 함께 일한 경험이 있었어요. 저와는 <우주의 7인>을 찍을 때 처음 만나 이후에 <터미네이터>와 <에이리언2>, <어비스>를 같이 만들었죠.
게일의 추천을 받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주의 7인>을 찍을 때 복도에서 제임스를 만나곤 했던 기억이 나더군요. <우주의 7인>은 제임스가 처음으로 맡은 장편 영화였어요. <우주의 7인>의 음악은 이전의 영화음악과 달리 웅장하고 풍부한 관현악이 주를 이뤘어요.
제임스는 적은 제작비로 놀라운 음악을 만들어냈어요. 신인 때부터 음악적 야심이 대단했습니다.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아, 다른 많은 신인 작곡가들과 달리 관현악 작곡에 해박했어요.
지휘 실력도 탁월했습니다. 관현악단의 연주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어요. 무엇보다 적은 돈으로 최고의 음악을 뽑아냈죠.
<우주의 7인>을 찍을 당시 저를 비롯한 제작진은 열악한 제작 환경에도 불구하고 시각적인 부분에 굉장히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제작비가 부족했지만 정교한 특수 효과로 최대한 화면을 부풀렸죠. 완성된 영상을 보니 제작비를 엄청 많이 투입한 영화로 보이더군요.
제임스의 음악까지 깔리니 더 그럴듯해 보였어요. 영화를 보고 로저 코먼 감독이 저에게 묻더군요. "제작비가 얼마나 든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2백만 달러도 안 들었지만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글쎄요. 5~6백만 달러가 들었다고 해도 믿을 것 같네요."(웃음) 겉보기에는 정말 그랬어요. 백만 달러 이상의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는 만들어본 적 없는 로저 코먼이 보기에는 놀라웠을 겁니다.
모두 제임스의 야심 찬 음악 덕분이었습니다. 평단의 반응도 꽤 좋았어요. B급 영화였지만 패기가 넘쳤죠.
그 뒤로도 제임스는 계속 좋은 평을 받았어요. 특히 <스타 트랙 2: 칸의 분노>의 음악이 호평을 받았죠. 이 영화에서도 장면을 갑자기 휘감는 웅장한 관현악을 배치해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렇게 제임스는 유능한 작곡가로 확실히 자리매김했고 이후로도 수많은 영화에서 다양하고 폭넓은 음악을 연출했습니다. 작곡가에게 중요한 또 다른 덕목인 다양성도 갖췄음을 보여주었죠.
제임스 호너를 알고 지낸 지 35년이 되었을 때 사고가 났는데요. 그가 탄 비행기가 추락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심정이 어떠셨나요?
안타깝게도 저는 예전에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어서 제일 처음 듣는 소식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말이죠. 곡예비행을 즐겨 하던 친구라 소식을 듣자마자 설마 하는 마음보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제임스가 죽었다는 사실이 곧바로 현실로 와 닿았죠.
그 뒤에 든 생각은 '제임스를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였지?" 였습니다. 그 친구와 함께한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고 싶었습니다.
다행히도 그와의 마지막 순간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친구나 가족, 지인들에게 소홀할 때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고가 나기 한 달 전쯤 소중한 사람을 챙길 기회가 있었습니다. 로영 앨버트 홀에서 유명한 관현악단이 <타이타닉>의 영상에 맞춰 영화음악을 처음부터 끝까지 라이브로 연주하는 공연에 초대를 받았는데, 제임스가 출연해 공연을 소개하기로 돼 있었습니다.
저는 공연에 비밀리에 참석해 모든 영광을 제임스에게 돌리기로 했습니다. 제임스를 빼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다녀오기로 했죠. 제가 제임스를 여전히 지지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고, 18년이 지난 지금까지 만인의 사랑을 받는 위대한 음악을 만든 작곡가로서 제임스가 관객에게 갈채를 받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 갔습니다. 제임스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냈어요. 곧 개봉될 <아바타>의 음악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본인이 음악을 연출해 무척 기대하는 눈치였어요. 그때가 제가 제임스를 본 마지막이었습니다.
공연은 정말 멋졌습니다. 제임스와 그의 음악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죠. 제임스는 고맙게도 저와 <타이타닉>의 제작자인 존 란다우를 무대로 끌어내 함께 박수갈채를 받게 해주었습니다. 십수 년 전 그와 함께 후세에 길이 남을 작품을 만들었다는 뿌듯함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제임스도 그랬겠지만 예술적 동지이자 친구인 그가 정말 친밀하게 느껴졌습니다. 그와 함께 만들 다음 작품이 기대됐습니다.
다른 영화음악과 구별되는 제임스의 음악만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재미있게도 제임스의 음악을 들어보면 <모래와 안개의 집>과 같은 드라마 영화나 <달리는 뜨거운 강>과 같은 모험 영화, <아폴로 13>처럼 긴장감이 감도는 강렬한 공상 과학 영화의 음악이 모두 다릅니다.
제임스의 음악의 중요한 특징은 다양성입니다. 제[임스는 듣는 이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강렬하고 화려한 금관 악기 소리와 저음, 중음, 고음이 잘 조화된 감동적인 현악기 소리를 능숙하게 조합했습니다. 강력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끌어내는 법을 정확히 알았죠.
또한 타악기나 이국적인 악기를 악단에 배치해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했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제가 보기에도 실험 정신이 무척 강한 작곡가였습니다.
이렇듯 매번 새로운 음악을 연출했지만, 그의 음악에는 늘 그만의 고유한 특징이 드러났습니다.
제임스의 음악은 웅장한 사운드로 영화에 걸맞은 감정을 정확히 이끌어냈습니다. 제임스는 감정을 매우 중시하는 작곡가였습니다. 논리적인 접근은 내키지 않아 했습니다. 각각의 장면에 묻어나는 정서를 자연스럽게 살렸고, 그것이 그의 강점이었습니다. 그는 대놓고 심리를 조종하지 않고 관객을 울리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음악으로 관객을 조종할 수는 없습니다. 제아무리 훌륭한 음악도 슬픔을 강요할 순 없습니다. 관객의 마음속에 기쁨이나 상실감 등의 감정이 충분히 차올랐을 때 그 감정을 강화해 눈물을 자아낼 수는 있지만, 없는 감정을 만들어낼 순 없습니다.
영화음악뿐 아니라 영화계 전체에 제임스 호너가 남긴 유산은 무엇일까요?
영화음악 분야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과 영화계 전체에 그가 기여한 바를 따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제임스는 30여 년 동안 백 편이 넘는 영화의 음악을 연출했습니다. 저예산 영화부터 엄청난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까지 다양한 영화를 맡았죠. 제작비가 제일 높은 영화는 제 영화였습니다.(웃음) 다행히 수익이 좋아서 아직 영화계에 발을 붙이고 있지만, 안 그랬다면 지금 이 인터뷰도 무료 급식소에서 해야 했을 겁니다.
저는 제임스가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세계적인 작곡가라는 사실 자체가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영화음악 업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영화 제작 과정에서 작곡가와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는 산증인입니다.
<타이타닉>을 편집할 때의 일입니다. 당시 제임스는 곡을 쓰는 족족 저에게 보내줬습니다. 관현악단에게 연주시킬 음악의 개요를 들려주려고 본인이 직접 연주해 보내주곤 했죠. 음악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저에게 음원을 녹음해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편집을 하고 있는데 '스케치'라고 적힌 CD가 한 장 배달 왔습니다. 편집 프로그램으로 남자 주인공이 스케치하는 장면에 그 음악을 깔았는데 화면과 싱크가 맞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장면 중에 일부가 편집됐거나 제임스가 예전 편집본에 맞춰 곡을 썼겠거니 했습니다.
음악을 앞뒤로 옮기다 보니 완벽하게 맞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다운 비트에 강세를 주는 피아노 연주였는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눈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장면에 깔았습니다. 디캐프리오가 케이트 윈즐릿을 그리면서 두 주인공의 눈이 마주치는 중요한 장면이었어요. 장면과 음악이 정말 잘 맞았습니다. 디캐프리오의 손동작 하나하나까지 모든 게 완벽히 들어맞았습니다. 피아노 독주엿어요. 아주 단순한 피아노 멜로디였죠.
흥분을 가눌 수 없어 얼른 제임스에게 전화를 걸어 외쳤습니다. "이 장면이랑 딱 맞아요!" 제임스가 "뭐가 딱 맞아요?" 라고 묻길래 "'스케치'라고 써서 보내준 음악을 스케치하는 장면에 깔았는데 환상적으로 어울려요"라고 했더니 제임스가 당황한 목소리로 그러던군요. "그 '스케치'가 아니에요. 그냥 개요를 뜻한 거예요. 피아노로 멜로디만 친 거라고요. 어디에든 끼워 넣을 수 있는 멜로디요." 하지만 저는 굴하지 않고 "뭐가 됐든 이 장면에 완벽하게 맞아요!" 라고 했어요. "정말요?"라고 묻는 제임스에게 얼른 오기나 하라고 했죠.
당시에 제임스의 집은 제 집과 멀지 않았어요. 곧 제임스가 집에 왔고 저는 편집을 하다 말고 그 장면ㅇ르 제임스에게 보여줬어요. 제임스도 인정하더군요. 그런데 어떤 피아니스트에게 연주시킬까 고민하는 눈치더니 "오케스트라에게 연주시킬게요."라고 하는 거에요. 얼른 말렸습니다. "안 돼요! 피아노만, 피아노만 쳐요! 이게 딱 좋아요. 이 장면에는 이게 딱 맞아요." 라고 했죠. 그러자 지금 런던에 없지만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를 안다며 섭외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뇨, 이미 당신이 쳤잖아요. 이 여주를 쓰면 돼요. 뭘 또 녹음해요. 이 장면은 됐으니 다른 장면에 맞는 곡이나 써요." 당황한 제임스가 "이건 그냥 시험 삼아 쳐본 거라고요!"라고 했지만 농담으로 받아쳤어요. "알아요, '스케치'한 거잖아요. 그림 그린 게 아니라요." 기가 막힌다는 듯 콧방귀를 뀌더군요.
제임스는 정말 내키지 않아 했어요. 본인의 연주 실력이 별로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도 저는 "이 장면에는 이 곡이 기막히게 맞아요!"라고 하며 밀어붙였어요.
다음에 혹시 <타이타닉>을 보게 되면, 스케치하는 장면에 나오는 음악을 잘 들어보세요. 제임스가 직접 연주한 거랍니다. 제임스가 영화음악에 자기가 직접 연주한 곡을 넣은 건 그때뿐일 거예요. 그 친구는 연주하는 걸 싫어해요. 연주는 세계 최고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죠.
죄송합니다. 제임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현재 시제로 말하는 게 버릇이 됐네요. 그의 음악이 있는 한 제임스는 늘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 있을 겁니다.
<타이타닉>의 유명한 엔딩곡은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요?
<타이타닉>의 촬영본을 편집하고 있을 때였어요. 제임스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더군요. 예산을 엄청나게 초과한 데다 일정이 미뤄진 건 물론이고 뭐 하나 계획대로 되는 게 없었거든요. 다들 우리를 놀리고 조롱했죠. 그래서 시큰둥하게 "기분이 좋지는 않네요. 뭐, 평생 좋아질 일 없을 테니 그냥 말해요. 또 무슨 일이에요?" 라고 했어요. 그러자 제임스가 "걱정 마세요. 곧 기분 좋아질 테니까."라고 하더니 편집실로 찾아와 "이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라고 하며 테이프를 내밀었어요. 저는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했지만 일단 들어보라고 하더군요.
제임스가 가져온 디지털 오디오 테이프를 재생하려고 편집실을 나와 DAT 녹음기가 있는 제 사무실로 갔어요. 사무실에 그와 단둘이 앉아 음악을 들었습니다. 켈트 악기로 연주한 기존 테마곡의 멜로디로 시작하더니 뒤로 갈수록 팝 음악의 느낌이 물씬 났어요.
저는 듣자마자 노래라는 걸 눈치 챘어요. 아니나 다를까, 가수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노래라 영 내키지 않았지만 일단 들어나 보자는 마음으로 들었어요. 그런데 의외로 가사도 그렇고 꽤 좋은 곡이더라고요. 영화의 주제가 집약된 노래였죠. 계속 들으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감정이 차올랐어요. 노래가 끝날 때쯤 에는 이 노래가 우리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곡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더군요. 전에 가사가 있는 노래를 넣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무조건 반대했는데 말이죠.
그때는 이랬거든요. "말도 안 돼요!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장면에 노래가 나오던가요? 이건 진지한 영화라고요." 노래는 무조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임스가 은근슬쩍 만들어 들려준 노래를 들으니 생각이 달라졌어요. <보디가드>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 휘트니 휴스턴의 [I Will Always Love You]가 떠오르더군요. 이 노래도 그렇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좋아요. 제작진 소개 자막 올라갈 때 넣읍시다."라고 했어요. 그때 제임스가 물었어요. "그런데 가수가 누군지는 아시겠어요?" 인기 가수는 한 명도 몰라서 모른다고 했더니 그러더군요. "셀린 디옹이에요." 셀린 디옹이 직접 데모 노래를 부른 거였어요. 민망하게도 저는 또 이렇게 물었답니다. "유명한 분 맞죠?"
<아바타>의 음악을 만들 때는 제임스가 조사를 아주 많이 했다던데요.
<아바타>는 지구와는 문화가 완전히 다른 외계 행성이 배경이라 <타이타닉> 때와는 차원이 달랐어요. 나비족이 인간이 아니라는 걸 상기키시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나비족의 언어를 만들었어요. 문화적 차이를 대충 얼버무리고 넘 어가는 유치한 공상 과학 영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아, 나비족의 문화를 깊이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제임스에게도 외계인이자 원주민인 나비족에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랬더니 무려 몇 달 동안 공을 들이더군요. 제임스는 제일 먼저 민족 음악학자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소리를 모으기 시작했어요. 목구멍 창법 (throat singing: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화음을 내는 창법)을 쓰는 불가리아의 가수를 비롯해 독특한 창법을 구사하는 세계 곳곳의 가수들은 물론이고, 처음 보는 목관 악기나 현악기 등 특이한 원주민 악기들을 찾아다녔습니다. 타악기도 종류가 정말 다양해서 가지각색의 타악기를 찾아 리듬을 조합했어요.
같이 들어보니 어떤 소리는 정말로 독특하고 낯설게 느껴지더군요. 그 소리를 영화음악에 넣는 건 좋았지만, 그러려면 웅장하게 휘몰아쳐 감정을 자아내는 관현악단의 연주가 더해져야 할 것 같았어요. 안 그러면 너무 생경해 이국적이고 낯선 느낌만 줄 뿐, 깊은 감정을 전달할 수 없을 것 같았죠.
그때부터 제임스는 이국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다수의 관객에게서 보편적인 감정을 이끌어내는 독특한 음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 결과 정말 놀라운 음악이 탄생했어요. 제임스의 작품 중에 손에 꼽히는 훌륭한 음악이었습니다. 제임스의 장기인, 장중한 관현악단의 연주와 독특한 노랫소리가 어우러진 최고의 음악이 완성됐죠. 몇몇 악절에서는 노랫소리가 분위기를 완전히 장악했어요.
누가 영화에 나오는 음악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물으면 어떻게 답하시겠어요?
음악이 영화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싶다면, 잠시 소리를 끄고 영화를 보면 됩니다. 장면을 가득 채웠던 에너지와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질 겁니다.
영화음악은 영화의 심장 박동이나 마찬가지에요. 영화의 리듬이자 영화가 감독이 원하는 방향으로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속도감이 빠른 장면에서 음악은 관객이 '어떡해! 주인공이 위험에 빠졌어!'라고 느끼게 해줍니다. 잔잔하고 느린 장면에서는 그에 맞는 감정을 끌어내고요.
영화음악은 등장인물과도 연결됩니다. 영화음악은 관객을 등장인물의 시각과 내면, 감정으로 안내합니다. 음악과 배우의 훌륭한 연기가 조화를 이루면 관객은 등장인물의 감정에 깊이 몰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화음악은 영화의 심장이자 영혼입니다.
-끝-
1.감독이 원하는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음악을 쓰자.
2.하지만 그의 아이디어(특히 임시음악)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3.행복한 우연은 백조의 다리같은 꾸준한 노력이 없으면 한 두번에 그치고 말 것이다.
4.나는 헤엄치고 있나? 글쎄, 일에만 매몰되어 되짚어 생각이란 걸 해보지 않거나 반대로 유투브 틀어놓고 멍하게 낭비하는 시간이 너무 많다.
5.주변의 고맙고 멋진 사람들을 따라갈 수 있어야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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