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일상생활 중에서도 범인과 사려 깊은 사람과의 현저한 특징적인 차이는, 전자가 있을 수 있는 위험에 대해 생각하고 이것을 평가함에 있어 언제나 이미 일어난 일만을 묻고 이 일만을 고려하는 것에 반해, 후자는 일어날 수 있는 것을 숙고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들 사려 깊은 사람들은 그때에 스페인 격언이 말하듯이 「1년 사이에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몇 분 내에 일어난다」는 것을 예견한다. 지금 말한 차이는 물론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을 꿰뚫어보려면 분멸이 필요하지만, 일어나 버린 것을 식별하려면 감각이 있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원칙은 이렇다. 악령들에게 희생을 바치라! 즉 어떤 불행의 가능성에 대해 문을 닫아 두기 위해선 어느 정도 고생한다든지, 시간을 소비한다든지, 불편한 일이나 번거로운 일을 참는다든지, 돈을 쓴다든지, 부족한 가운데 지내는 것을 무서워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렇게 희생하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불행의 가능성은 더 희박해지고 멀어지고 없어지게까지 된다. 그 법칙의 가장 확실한 실례가 보험료이다. 보험료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악령의 신전으로 보내지는 공적인 희생물이다.

51. 어떤 일이 일어나도 지나치게 기뻐하고 지나치게 슬퍼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어떤 사건이라 해도 갑작스럽게 모습이 바뀔 정도로 사물은 변하기 쉬운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이익이 있거나 불리한 것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그릇되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나중에 한 번은 자기에게 참으로 최선이라고 판명된 것에 대해 불평을 한다든지 또는 그 사람의 최대의 괴로움의 원천에 대해 환호성을 지르는 일이 있다. 이런 것에 대처해서 권해지는 것을 셰익스피어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는 너무나 많은 기쁨과 슬픔의 발작을 통감했기에, 둘 중의 하나가 일어나는 기회가 있어도 이제 여자처럼 곧 감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모든 불행에 처했어도 침착하기만 한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날 수 있는 재난이 얼마나 크고 천태만상인가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 사람은 현재 일어난 불행은 닥쳐올 불행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스토아 학파적인 사고방식이다. 이런 사고방식에 따르려면 사람은 결코 「인간의 운명을 잊어버린다는 일 없이 인간 존재 일반의 운명이 얼마나 불쌍하고 슬픈 것이며, 또 인간 존재가 당하고 있는 재난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통찰을 생생하게 체득하려면 인간은 오직 자신의 주위를 한 번 돌아다보기만 하면 된다. 어디에 가든지 그 사람은 곧 불행하고 차디찬, 그렇다고 해서 내던져 버릴 수 없는 생존을 위한 싸움·동요, 그리고 고통을 맛보게 된다. 그뒤로는 그 사람도 요구 정도를 낮추고, 모든 사물이나 상태의 불완전성 속에 몸을 맡기는 걸 배우고, 재난을 피하고 또 재난에 견디기 위해 그 재난의 도래를 언제나 감시하게 된다. 왜냐하면 대소를 불문하고 재난은 우리 삶의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나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불만」을 마음에 품고 베리즈포드와 함께 매시간마다 겪는 「인간생활의 불행」을 탄식하며 얼굴을 찡그린 채 신의 도움을 청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모름지기 「사려깊은 자」로서 그것이 인간에게서 일어난 것이든 사물에게서 일어난 것이든 재난을 예방하고 재난을 숨겨 가는 신중성을 몸에 굳게 익힘과 동시에 그것을 연마하여, 영악한 여우처럼 모든 대소의 재난(이것들의 대부분은 일종의 졸렬함에서 일어난다)에서 깨끗이 벗어나야 한다.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도 우리가 그것을 미리부터 일어날 것이라 보고 또 이것에 대한 각오가 되어 있을 때에는 그렇게 괴롭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그러한 경우에 대해 그것이 도래하기 전부터 하나의 단순한 가능성으로서 조용하게 생각해 본다면, 그 불행의 크기에 대해 확실하게 모든 방면에서 개관하고 이것을 적어도 한도가 있는 것, 간과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현재 불행이 닥쳐왔다고 해도 이 불행은 그 참된 크기 이상의 작용은 할 수 없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이런 일을 해 두지 않고,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부딪치게 되면 당황하게 되어 처음 순간엔 불행의 정도를 측정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불행은 간과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곧 목전의 불행이 헤아릴 수 엉ㅄ을 정도로 큰 것, 적어도 실제보다 훨씬 큰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둠과 불확실성은 모든 위험을 훨씬 큰 것으로 나타낸다. 또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예견한 불행 때문에 미리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근거와 대항수단을 생각하거나, 또는 이런 일을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질 수 있다는 것도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불행한 사건을 가장 냉철하게 견뎌나가게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진리를 확신하는 일이다. 나는 이미 이 진리를 <의지의 자유에 대해서>라는 나의 현상논문 속에 그 최종적인 근거를 끌어내어 자세히 설명한 바 있는데, 그것은 「발생하는 모든것은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에서는 인간은 곧 체념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며, 내가 열거한 진리를 인식하고 있기만 하면, 인간은 정말 기묘한 우연으로 초래된 것까지도 널리 알려진 법칙대로 모두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내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속에서 불가피한 것·필연적인 것의 인식이 마음을 진정시키는 작용을 한다는 것에 대해 논술한 것을 참고로 해주기 바란다. 이것을 완전히 알아 낸 사람은 우선 첫째로,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난 뒤에는 반드시 자기가 겪어야만 하는 것에 기꺼이 견디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매시간마다 괴롭히는 작은 재난은, 큰 재난에 견딜 수 있는 힘이 행복한 때에도 결코 쇠퇴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날의 보잘것없는 재난, 사람과 사귀고 있는 동안에 생기는 언쟁, 하찮은 싸움, 남의 뻔뻔스러움, 본인이 없는 데서 하는 험담 등에 대해서 신경을 쓴다든지 마음을 상하고 괴로와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런 것에 사로잡히지 말고, 마치 길가에 내던져진 돌처럼 감연히 발길로 걷어차고, 결코 가슴속에 간직하여 되풀이해 가면서 속을 썩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52. 그러나 사람들이 보통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개의 경우는 단지 그들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에서 오는 것이다. 따라서 「현명한 숙고」를 권하고 있는 호메로스의 아름다운 부분을 충분히 마음에 새겨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쁜 짓은 저쪽 세상에서 보복을 당하는 것이지만, 어리석은 행동은 이미 이 세상에서 보복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것에도 은총이 주어지는 일이 있기는 하다. 이런 사실에 분노하지 않고 현명하게 통찰한 자는 무섭고 위험한 존재로 보인다. 확실히 인간의 두뇌는 사자의 발톱보다도 무서운 무기이다.
 완전하게 세상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란 사물에 대해 주저하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일이 없고, 너무 성급히 사물에 손을 대는 일도 없는 사람이다.

53. 현명함과 동시에 용기는 우리의 행복에는 아주 본질적인 특성이다. 물론 사람은 현명함과 용기를 자기 힘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전자는 어머니에게서, 후자는 아버지에게서 계승받는다. 그러나 의지와 생활을 통해 이어받은 것을 더 잘 활용할 수가 있다. 「주사위는 철과 같이 냉혹한 패를 낸다.」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운명이나 인간에게나 감연히 견디어 갈 수 있는 무장된 철과 같은 감각이다. 왜냐하면 모든 삶은 싸움이며, 모든 발걸음은 곧 싸움의 원이 되기 떄문이다. 볼테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은 칼을 가지고서만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고, 무기를 손에 쥐고 죽는다.」따라서 구름이 몰려오는 것만으로, 또는 구름이 지평선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만으로, 몸을 움츠리고 망설이고 슬퍼하는 자는 비겁한 자이다. 오히려 우리의 표어는 이렇다.

 재난을 피하지 말고 용감하게 재난에 맞서라.

 위험한 사물의 결말이 아직 확실치 않는 한, 또 그 결말이 행복한 것으로 될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는 한, 주저하고 괴로와하지 말고 오로지 저항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창공에 푸른 곳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절망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같은 사정이다. 그렇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머리 위에서 세계가 무너질 때면
 그 잔해도 주저없이 명중한다.

 재산은 말할 것도 없고 생명까지도, 그 때문에 마음을 비겁하게 떨고 움츠릴 까닭이 없다.

 그렇다, 용감하게 살아라.
 그리고 용감하게 가슴을 펴고 운명의 타격에 맞서라.


 하지만 이 점에 있어서도 지나친 것이 있기는 한다. 그것은 인간은 자칫하면 앞뒤 생각 없이 행동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이 세상에서의 생존을 위해서는 다소의 공포심도 필요하다. 비겁하다는 것은 공포심이 지나치게 커진다는 말이다. 베루람 출신의 베이컨은 「갑작스러운 공포」라는 말을 어원적으로 설명하면서 적절하게 표현했다. 이것은 고대에 플루타르코스가 전한 것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베이컨은 그 설명에서 인격화한 자연인 목양신 판에 대해 언급하고 계속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연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공포심을 준 것은, 그 생명과 본질을 보존하게 하고 엄습하여 오는 재난을 피하게 하며, 이것으로부터 보호하게 해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런 자연이 그 정도를 알맞게 조화시키지 못하고 유익한 공포심에 언제나 무의미하고 공허한 공포심을 섞어 놓았기 떄문에, 모든 사물 특히 인간은 (내면적으로 보았을 때) 갑작스런 공포심에 사로잡힌다.」
 또한 갑작스런 공포심의 특징은 공포심에 몰린 사람이 그 공포심의 근거를 확실히 인식하지 못한 채 그 근거를 알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극단의 경우에는 공포 그 자체를 공포의 근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제 5장 - 처세에 관하여 中)









어느 토요일 아침 숙취에 시달리다가 손을 뻗어 잡히는 책의 아무데나 펼쳐읽었는데 내용이 너무 생생하게 다가왔다. 나의 단독성과 공명한 이유일까. 틀린 말은 아닐테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니 사실 혈관에 흐르고 있던 알코올이 주된 원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 보험료를 더 열심히 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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