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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강철의 숲 - 미야시타 나츠

by 장삼도 2024. 8. 31.

 

42. 

 "최대한 구제적인 대상의 이름을 알고 그 세부를 떠올릴 수 있는 것, 이게 생각보다 중요하거든."

 

45.

 "데친 아스파라거스에 곁들여 먹을 때는 온천 달걀처럼 쫀득쫀득하게 삶은 달걀이 좋아. 아스파라거스에 달걀을 소스처럼 묻혀서 먹으면 맛있지. 안 그래? 고객이 그걸 먹어본 적이 있고, 그래도 여전히 완숙이 좋다고 하는지, 아니면 푹 삶은 달걀만 알아서 그게 좋다고 말하는지 구분하기가 어려워."

(중략)

 "부드러운 소리를 원한다고 했을 때에도 의심해야 해. 어떤 부드러움을 상상하는지. 정말로 부드러움을 필요로 하는지. 기술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일단은 의사소통이야. 되도록 구체적으로 어떤 소리를 원하는지, 그 이미지를 제대로 확인해야 해." 

 

46. 

 "목표로 하는 소리라."

(중략)

 "밝고 조용하고 맑은 그리운 문체, 조금은 응석을 부리는 것 같으면서 엄격하고 깊은 것을 담고 있는 문체, 꿈처럼 아름답지만 현실처럼 분명한 문체." 

 "하라 다미키가 그런 문체를 동경한다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황홀했습니다. 내가 이상으로 삼는 소리를 그대로 표현해준 것 같았죠." 

 

82.

 사실 나는 남동생을 질투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좋은 것을 싹쓸이하는 동생이 부러웠다. 그래도 모르는 척했다. 운이 좋다거나 타고난 소질처럼, 부러워해도 어쩔 수 없는 것에 집착하면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을 놓칠 테니까.

 

91.

 "도무라가 가서 어쩌려고. 간다고 무슨 도움이 되는데."

 귀에 들릴락 말락 한 성량으로 아키노 씨가 중얼거렸다. 어디를 가든 불쾌한 티를 내는 사람은 있고, 그런 사람은 꼭 남의 기분을 짓밟는 말을 하는 법이다. 산속 작은 마을에도 있었고 고등학교에도 있었다. 고객 중에도 있고 이 사무소에도 있다. 신경을 쓰면 끝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의 말은 역시 정론이었다. 정론이기에 대답해야만 했다.

 "5년 후에."

 말을 꺼내다가 정정했다.

 "죄송합니다. 10년 후요. 10년 후에 열매를 맺기 위한 공부입니다."

 

101.

아키노 씨라면 좀 더, 좀 더 많이 배울 수 있었겠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있는 나는 배울 것이 모래처럼 많아서 바위를 포착하지 못한다. 똑같은 조율을 봐도 아키노 씨라면 바위 밭을 성큼성큼 빠져나갈 발판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아키노 씨, 아키노 씨의 조율도 한번 보여주세요."

 내 말에 아키노 씨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이 좋은 것도 정도껏 해야지."

 그렇게 말하더니 얼른 표정을 굳히고, 덧붙여 말햇다.

 "칭찬이 아니야." 

 

113.

 변할 리 없는 기준 음이 시대와 함께 조금씩 높아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밝은 소리를 바라기 때문일까? 일부러 밝음을 요구하는 이유는 분명 밝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들 초조해하는 것 같아요. 기준 음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걸 보면요." 

 

119.

 특히 남동생이 생글생글 웃으며 엄마나 할머니와 말하고 있을 때면 나도 모르게 혼자 뒷문으로 빠져나와 밖으로 나갔다. 뒷마당에서 바로 연결된 숲을 정처 없이 걸으며 숲의 진한 냄새를 맡고 나무 잎사귀들이 스치는 소리를 듣다 보면 서서히 감정이 정리되었다. 어디에 있으면 좋을지 모르겠는, 어디에 있어도 침착해지지 못하는 위화감은 흙과 풀을 밟는 감촉과 나무 저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나 멀리서 들리는 짐승 소리를 듣다보면 사라졌다. 혼자 걷고 있을 때만큼은 다 괜찮다고 느꼈다.

 내가 피아노 안에서 찾은 감각도 그것이다. 다 괜찮다, 세계와 조화를 이룬다. 그 감각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로는 전부 전달할 수 없으니까 소리로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어쩌면 피아노로 그 숲을 재연하고자 소망하는지도 모른다. 

 

127.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지팡이로 삼아 일어나는 것. 세계의 질서를 세워주는 것. 그것이 있기에 살 수 있고 없으면 살 수 없는 그런 것.

 

136.

 어려운 주문이다. 처음 한입으로 마음에 쏙 들 맛, 소리. 마지막까지 맛있다고 느낄 맛, 소리. 나는, 누군가가 나를 계속 만나다가 조금씩 친숙해지면서 제법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해준다면 그 것으로 만족한다. 조율하는 인간이 이렇게 어수룩한데 내가 자아내는 소리가 처음부터 상대의 마음을 확 사로잡을 리가 없다. 

 

138.

 무엇 하나 헛되지 않다는 생각도 들고, 전부 다 완벽하게 헛된 짓이라는 생각도 든다. 피아노와 마주하는 것도,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도. 

 

139. 

 만약 조율이 개인 종목이라면 약간의 편법을 사용해도 괜찮다. 걷지 않고 택시를 타고 목적지까지 향해도 괜찮다. 목적지에 가서 조율하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하지만 조율사의 일은 혼자서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비로소 보람이 생긴다. 그래서 걸어갈 수밖에 없다. 연주하는 누군가의 요구를 들으려면 한걸음에 달려서 목적지까지 가면 안 된다. 고치지 못하니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확인하면서 접근한다. 그 여정을 침착하게 걸어가기에 발자국이 남는다. 언젠가 길을 잃어 돌아와야 할 때, 그 발자국이 표식이 되어준다. 어디까지 돌아가면 되는지, 어디에서 틀렸는지 확인할 수 있다. 수정도 할 수 있다. 

(중략)

"평판 좋은 라면집이."

 처음 한입으로 인상에 남으려고 맛을 진하게 하는 이유는 누가 먹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누가 먹을지 안다면 그 사람 입맛에 맞게 만들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향에 가까운 소리가 있으면서도 누군가 원하는 방향대로 소리를 만들어야하고, 그 협업 작업을 통해서만 제대로 된 완성을 시킬 수 있는 것에 공감이 되었다.) 

 

158.

 음악은 경쟁이 아니다. 그렇다면 조율사도 그렇다. 조율사의 일은 경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목적으로 삼은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한 가지 장소가 아니라 한 가지 상태가 아닐까.

 '밝고 조용하고 맑고 그리운 문체, 조금은 응석을 부리는 것 같으면서 엄격하고 깊은 것을 담고 있는 문체, 꿈처럼 아름답지만 현실처럼 분명한 문체.'

 수없이 읽고 또 읽어 암기해버린 하라 다미키의 문장을 떠올렸다. 문장 자체도 아름다워서 입으로 말하는 기분이 밝아진다. 내가 조율하면서 목표로 삼는 지향점을 이 이상으로 잘 표현해주는 말은 없다.

 

198.

 "피아노로 먹고사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란다."

(중략) 극소수라고 해서 포기하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말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런 목소리였다. 

 "피아노로 먹고살 생각은 없어요."

 가즈네가 대답했다. 

 "피아노와 함께 살아갈 거야."

 

214.

 "음악이 제 인생에 도움이 될지 말지, 그런 건 몰랐어요. 그래도 제 인생은 그때 시작됐어요. 도움이 될지 말지의 문제를 훌쩍 뛰어넘은 체험이었어요." 

 

216.

 "그 딱딱거리는 소리요, 사소한 실마리란 어쩌면 조율사에게는 까치 같은 것이 아닐까요?" (중략) "까치들이 은하수에 다리를 만들어준다는 설화가 있잖아요. 그렇게 피아노와 피아니스트를 이어주는 까치는 한 마리씩 여기저기에서 모아오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중략)

 길이 험준하다. 저 앞까지 너무 멀어서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중략)
 매일 피아노를 만지는 행위, 고객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 조율 도구를 깨끗하게 닦는 행위. 사무소의 피아노를 한 대씩 다시 조율하는 행위나 피아노 곡집을 듣는 행위. 이타도리 씨에게 받는 힌트. 가즈네의 음색. 그리고 어쩌면, 짧은 여름에 풀숲의 훗훗한 열기 속에서 뒹굴었떤 것이나 밤에 산속에서 오롯이 빛나는 나무를 본 것이나 샘물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것. 그 전부가 까치이다.

 

220.

 가즈네는 무언가를 꾹 참고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 노력한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노력은 보상을받으려는 마음이 있어서 소심하게 끝난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있는 범위 안에서 노력하고 그 대가를 회수하려고 하다 보니 그저 노력에 그치고 만다. 하지만 그 노력을 노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하게 되면 상상을 뛰어넘는 가능성이 펼쳐진다.

 가즈네는 부러울 만큼 고결한 정신으로 피아노를 마주한다. 피아노를 마주하는 동시에 이 세상과 마주한다. 

 

239.

 "별자리 수. 여든여덟 개는 피아노 건반 수와 같아." 

 

269.

 "도무라 같은 사람이 도달할지도 모르지. (중략) 음. 뭐랄까, 성실하게 자란 것 같은 솔직한 사람. (중략) 도무라 군 같은 사람이 끈기 있게 한 걸음 한 걸음, 양과 강철의 숲을 꼐속 걸어가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