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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 홍세화

장삼도 2012. 2. 13. 11:12
 

내가 감동하여 그에게 "당신은 참으로 친절하십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가 나에게 대꾸한 말이 바로 `한 사회와 다른사회의 만남과 그 중요성`이었다.

 그는 이미 `다른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내가 그때까지 알고있던 `교수들의 사회`에 속해있지 않았다.

 그는 "나는 맑스주의자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 대신에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맑스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하여 또 나에게 `다른 사회`에 와 있음을 확인시켰다. 몇차례의 만남을 통하여, 그가 프랑스 북분에 있는 릴르 대학 출신이라는 것과 그의 대학시절에 한국전쟁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무살 안팎이던 당시부터 이미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몸으로 뛰었다. 그는 나에게 "그때 우리는 미군이 저질렀다고 알려진 세균전을 규탄했었는데 그것이 실제 있었던 일이었는지 지금은 잘모르겠다"며 젊을 때보다 신중해진 자신을 말하였다. 그것은 특히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기초한 데마고기의 위험에 대한 강한 반대의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52p)

 

 

 

 

 

 

내가 바라본 것은 거대한 데모대의 여유있는 움직임이었는데 ....(중략) 그것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며 눈시울이 붉어지게 된 것은 그 데모대 중에서 다섯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를 목격한 순간이었다. 그 아이는 아버지인 듯한 이의 무등을 타고 있었는데 데마에 참가하게 된 것이 마냥 즐겁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아이의 무구한 표정이 서울 데모현장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나의 콧등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이 그 아이의 표정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갑자기 독한 최루탄 가스가 상기되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53p)

 

 

 

 

 

 

 

"죄송합니다 손님. 나는 초보자라서 몽마르뜨르로가 어딘지 모릅니다. 길을 가르쳐주시겠습니까?" 그리고 택시 미터기를 처음 위치로 돌렸다.

 그가 길을 가르쳐주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요금이 27프랑이 나왔다. 그는 45프랑을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 온 길을 자주 택시를 이용하는데 요금이 보통 40프랑 나오지요"

 내가 그에게 고맙다고 하고 다시 초보자라 미안하게 되었다고 말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초보자라고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모든 직업에 데뷔 시기는 있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몽마르뜨르로는 꽤 중요한 길이니까 잘 알아두세요"

 

그는 웃으면서 멀어졌다. ... 나는 사라져가는 그에게 끝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서른살이 될까말까한 그가 다시 만나지 않을 이방인에게 베푼 관대함과 친절에서 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그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나의 본보기가 되었다. (97p)

 

 

 

 

 

 

베르뜨랑은 그의 권리를 주장한 데 반해 나는 그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 아니라, 그런 주장을 하는 그를 미워한 점이다. 그의 주장이 틀렸으면 그 주장을 반박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를 미워했다. 그는 나를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에게는 단지 그와 나의 생각이 서로 달랐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싸운 이튿날 그는 나에게 자연스럽게 평소처럼 대했고 나는 계속 앙심을 품고 있었다.

.... 다시 말해 프랑스인들은 다른 사람의 의견, 주의 주장 또는 사상을 일단 그의 것으로 존중하고 받아들인 다음, 논쟁을 통하여 설득하려고 노력하는데 비하여 우리는 나의 잣대로 상대를 보고 그 잣대에 어긋나면 바로 미워하고 증오한다. 이 글을 끝까지 읽는 독자는 곧 이해하게 되겠지만 그와같은 독선적인 논리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나 자신조차 그 함정에 빠져 베르뜨랑을미워했던 것이다. (112p)

 

 

 

 

 

 

"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혹시 자본주의를 말하고 싶은 건가요?"

 "그보다는 우선 분단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분단은 우리들에게 섬보다도 더 지독한 섬을 강요했소. 반쪽의 이념으로 사고의 영역이 제한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땅덩어리도 섬보다도 더 폐쇄되었기 때문에 대륙적인 기질을 잃어버리고 왜소해진 게 아닌가 싶소. ..... 그 위에 지금 씰비가 지적한 자본주의의 영향도 있었을 거요." (130p)

 

 

 

 

 

 

 그 때 김지하 선배는 필리핀의 후크와 막사이사이에 관계된, 나중에 내가 모택동의 이른바 `물과 물고기론`으로 알게 되는 에피쏘드를 얘기했었다. 그 얘기의 내용은 이런것이었다.

 

 필리핀이 이차대전중에 일본에 점령되었던 동안 가장 중요한 항일무장투쟁 세력이었던 후크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다시 밀림의 게릴라가 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전후 필리핀에는 미국의 영향 아래 부일 세력과 연합한 우파 정권이 들어서겍 되었고, 특히 중국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뒤엔 반공노선을 강화하여 후크를 불법화시켰기 때문이다. 당시의 후크가 모택동의 사상을 따르고 있었던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마을사람들로부터 양식을 제공받는 등의 도움을 받으면 그 대가를 꼭 지불했고 그것이 불가능할 땐 마을에 공동우물을 파주든지 하는 등의 노력 봉사를 하고 나서야 마을을 떠나곤 했다. 필리핀의 경찰이나 정부군은 이 마을사람들을 후크에 부역한 자들이라 하여 박해했는데 그 박해가 심해질수록 후크의 영향력은 더 커질 뿐이었다. 그럴 즈음에 막사이사이가 국방장관이 되었다. 그는 나중에 대통령이 되었으나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그는 후크가 파주었던 공동우물을 부수거나 마을사람들을 박해하는 대신에 그 공동우물이 비를 맞지 않게 우물지붕을 만들어주는 등의 정책을 폈다. 모택동의 `물과 물고기 이론`을 역으로 적용했던 막사이사이에 의하여 후크는 약화되었고 드디어 1954년에 투항하였다. (134p)

 

 

 

 

 

 

 

"야! 거스름돈 줘!" 버스차장이 "여기 있어요"하고 거스름돈을....

- 그 대학생은 반말을 했다. 그녀는 반말을 듣고도 잠자코 있었을 뿐 아니라 존대말로 대꾸했다. 그 두 사람의 나이는 비슷했다. 그 대학생은 그 차장과 같은 나이 또래의 여대생에게 반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

나는 그떄 사회를 지배하는 집단적인 무의식과 그 편견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던 셈이다.... 무의식적인 편견은 의식적인 편견에 비하여 무의식이기 때문에 더욱 수정하기 어려우리라는 것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후에 나는 누구에게도 반말을 쓰기 어려워했고 또 이 경험을 자주 돌이켜 생각하였다. (168p)

 

 

 

 

 

 

오오까의 밀감 (215p)

 

 

 

 

 

 

수현아, 용빈아,

사람이 미래를 모르고 살면 불안하긴 하나 위험하지는 않단다. 아니, 미래를 모르고 사는 것이 오히려 축복일 수도 있단다. 그러나 과거를 모르고 사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란다. 그것이 개인의 과거이든 민족의 과거이든... (226p)

 

 

 

 

 

 

 

똘레랑스란 첫째로,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뜻합니다. ..... 프랑스말 사전이 밝힌 똘레랑스의 첫번째 뜻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존중하시오, 그리하여 존중하게 하시오(respectez, et faites respecter)." 이렇게 적혀 있는 팻말이 공원의 잔디밭에 서 있는 것을 당신은 자주 목격할 수 있었을 겁니다. .... 잔디밭을 존중하여 스스로 존중받으라는 말이지요. 똘레랑스는 바로 이 팻말과 똑같은 요구를 담고 있습니다. (28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