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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입술을 다문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인선의 옆얼굴을 나는 보았다. 특별한 미인이 아니지만 이상하게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녀가 그랬다. 총기 있는 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성격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어떤 말도 허투루 뱉지 않는, 잠시라도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 때문일 거라고. 인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혼돈과 희미한 것, 불분명한 것들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과 몸짓에 배어 있었다. -44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육지 말과 다르게 활용되는 동사와 형용사의 어미들이.. 2023. 10. 23.
인생 - 위화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현실과 긴장 관계에 있다. 좀더 심각하게 말하자면, 나는 줄곧 현실을 적대적인 태도로 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속의 분노가 점차 사그라지자, 나는 진정한 작가가 찾으려는 것은 진리, 즉 도덕적인 판단을 배격하는 진리라는 걸 깨달았다. 작가의 사명은 발설이나 고발 혹은 폭로가 아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고상함을 보여줘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상함이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에 오는 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 바로 이러한 심정으로 나는 미국의 민요 를 들었다. 노래 속 늙은 흑인 노예는 평생 고통스런 삶을 살았고, 그의 가족은 모두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원망의 말 한마디 없이 .. 2023. 7. 30.
완벽한 아이 - 모드 쥘리앵 어머니는 내가 펜으로 굵은 선과 가는 선을 다 잘 긋는지 지켜보다가 조금만 잉크가 번져도 마구 화를 냈다. 아예 내가 써놓은 페이지를 찢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쓰게 하기도 했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려서 어떻게 해야 눈물을 참을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잉크는 금방 번지고, 그러면 어머니는 더욱 짜증을 냈다. 쓰기 수업이 끝나면 나는 잉크 범벅이 되어 시커매진 손으로 방을 나서곤 했다. 어머니 눈에 나는 음흉한 아이, 바닥 없는 우물처럼 사악한 생각이 가득한 아이다. 글을 쓰면서 일부러 얼룩을 만들고, 식탁 유리도 일부러 금가게 한다. 발을 헛디디는 것도, 정원에서 풀을 뽑다가 살갗이 벗져기는 것도 일부러 하는 짓이다. 나는 일부러 넘어지고, 일부러 긁힌다. 밥 먹듯이 속이는 '협잡꾼'에, 뭐든 늘 거짓으.. 2023. 5. 5.
쳇 베이커, 라흐마니노프를 만나다 2023.4.2 일요일 예당 챔버홀 정환호 피아니스트님 등장 라흐마니노프의 캐릭터를 굉장히 맛깔나고 위트있게 소개시켜주셨다. (feat.MBTI) 덕분에 그에 대해 여태까지 이런 식으로 대충 구겨 넣었던 카테고리에서 같은 이미지가 추가되어 그의 생애가 좀 더 궁금해졌다..! 1.어릴 때부터 재능이 많고 실력이 뛰어났지만 첫 교향곡이 악평을 받았다. 쇼미더머니 디스전에서도 들어보지 못했을 구체적으로 창의적인 혹평은 다음과 같다... " 이집트의 10가지 재앙같다. 지옥의 음악 학교가 있다면 교장감이다" 대략 이런 내용의 ppt가 나오자마자 관객들 빵터짐 2.찾아온 우울증, 그렇게 좋아하던 피아노와 작곡을 3년이나 등한시하다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우울증 치료와 최면술을 받고 그 쌤에게 헌정한 피협2번.. 2023. 4. 3.